흔히 우리나라가 일본에 비해 5년 뒤졌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비교는 경제 지표나 규모에 대한 단순 비교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또 일본을 하나의 목표로 삼아 그걸 뛰어넘으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요즘 그런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 경제 규모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단순한 비교는 무리가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일본을 훨씬 앞질렀기 때문이다.
다만 문화의 몇 가지 상황을 보면 일본의 5년 전 모습을 재연하는 것이 아닌지 마음이 썩 편치 않다. 국내에서 인기를 끈 '직장의 신' '여왕의 교실' '수상한 가정부' 등 TV드라마들은 일본에서 수년 전 히트한 '파견의 품격' '여왕의 교실' '가정부 미타'를 그대로 들여와 리메이크한 것이다. 스토리도 별반 다르지 않을뿐더러 침체된 일본 사회에 드러난 극단적인 병리 현상을 우리 현실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시도도 마뜩지 않다.
일 드라마 복사판 국내 안방 점령
물론 계약직 사원, 공교육의 붕괴, 가족애 부재 등 사회의 본질적인 고민을 다루려는 시도라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왜 우리 스스로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고 일본 드라마에 의탁하려 하는지 의문이 든다. 정치ㆍ역사적으로 일본을 비난하면서도 문화 면에서는 그들의 것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지,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우리 스스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요즘 우리 드라마 수준이 바닥이다. 막장에 막장을 거듭하고 우리 사회를 하나로 아우르는 담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 반대로 일본은 오히려 다양성을 통해 하나로 결집하는 모습을 조금씩 보인다. 2010년 NHK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료마전'에서도 나타난다. 이 드라마는 도쿠가와 막부를 종식시키고 근대 일본으로 나아가는 데 밑거름이 된 사카모토 료마를 부각시켰는데 드라마에 대한 일본인들의 감흥이 문화 콘텐츠로 확대 재생산돼 대중문화의 효용성을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우연찮게도 이즈음 일본이 우경화로 나아가는 것도 이 드라마의 영향이 시나브로 작용한 단면이다.
냉철한 사회 비판 통해 정체성 세워야
올여름 방영돼 시청률 42%를 기록한 '한자와 나오키'는 한 은행원이 부조리와 권력에 맞서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내용으로 불의에 맞서는 올곧은 은행원 한자와를 통해 조용한 일본인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더욱이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아베 정권의 모습을 투영해 일본 사회의 큰 화젯거리가 됐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기억을 더듬어보면 '대장금' '주몽' 등 이후 한국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갖춘 국민 드라마라고 부를 작품은 없었던 듯하다. 의식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한국의 정체성을 담았던 드라마가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역사 드라마들은 소재의 단순 반복이거나 역사와는 무관한 퓨전 사극일 뿐 현 시대에 대한 고민이나 투영은 없다.
그렇다면 창의적 상상력의 부재와 눈앞의 성과만을 추구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문화 정체성은 무엇이며 사회적 전형성의 진보적 발전은 무엇일까. 백범 김구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이라며 '문화의 힘'을 강조했다. 결국 존경받는 문화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냉철한 비판과 우리 문화의 깊은 애증과 성찰에서 비롯된다는 단순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