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직후에 망언으로 뒤통수
3대 사과 담화도 진정성 의문
뉘우침 없다면 대화도 불가능
韓 과거인식 20년전보다 후퇴
역사교육으로 日 딛고 나가야
일본이 정상회담을 제안했다는 소식에 두 가지 질문이 맴돈다. ‘한일 관계는 20년 전보다 나아졌을까. 우리 국민들의 역사 인식은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질문에 답하려니 일본인 지인 한 사람이 떠오른다. 청국장과 판소리를 한국인보다 더 즐기는 그가 술자리 토론에서 인용 형식을 빌려 어렵사리 던진 질문. “일본 우파 지식인들은 이런 불만이 많아. ‘한국은 왜 그리 요구가 많은가, 도대체 언제까지 일본이 사과해야 한다는 말이냐’고….” 일본이 거의 매년 식민지배와 침략을 사과하는데도 만족하지 모른다는 얘기에 반은 동의하며 되물었다. ‘맞다, 그런데 사과하고 나서는 꼭 망언(妄言)이 뒤따르더라?!’
정말 그렇다. 식민지배 반성 발언이 연례적으로 나온다. 표현도 다양하다. 사과와 반성에서 유감, 통석의 염(念)까지 온갖 언어가 동원된다. 문제는 언제나 망언을 동반했다는 사실이다. 사례가 많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일본의 진심이 담겼다는 ‘3대 반성 담화’만 꼽아보자.
1982년 한여름, 한국의 반일 감정은 폭염보다 뜨거웠다. 일본 문부성이 교과서 검정에서 3ㆍ1운동을 폭동으로, 침략을 진출로 수정한 탓이다. 외교적 마찰로 비화하자 미야자와 기이치 관방장관이 ‘교과서를 만들 때 한국과 중국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담화를 내놓으며 진화에 나섰다. 한국은 이를 높이 샀으나 불과 며칠 뒤 미야자와 담화를 뒤집는 국토청장관과 우정장관의 발언이 나오며 양국 관계는 다시 험악해졌다.
11년이 지난 1993년 8월, 위안부 문제가 국제 여론을 타자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위안소의 설치ㆍ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옛 일본군이 관여했다’며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고노담화로부터 8개월 뒤 나가노 시케토 법무장관이 ‘위안부는 공창(公娼)’이라고 지껄였다. 고노담화 직후엔 서울에서 열린 한일 기업인 친목모임이 국민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항만과 건설, 농지 정리, 교육 분야 등 한국에 기여한 측면이 크다’는 일본인 교수의 주제 발표에 나라가 들끓었다.
1995년에는 일본의 실질적 국가 원수인 총리가 직접 총대를 맸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태평양전쟁과 식민지 지배, 침략’을 사죄한 것이다. 무라야마 담화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에토 다카미 총무처 장관이 ‘한일합방은 국제법으로 정당하며 일본이 아니었으면 조선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됐을 것’이라는 망언으로 내뱉었다.
정리하자면 사과나 유감 표명의 뒤에는 언제나 망언 시리즈가 따라붙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일본의 뒤통수치기를 놔두고 있어야 하나. 제대로 짚어줄 정치인은 없는가?’ 올 7월10일 여기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얻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언론사 논설실장들과 오찬을 나눈 자리에서 한일 정상회담에 대한 질문을 받자 정상회담 이후에 또 독도와 위안부 문제가 불거지면 도움이 안된다는 취지로 답했다. 정상끼리 만나 악수하고 사과한 뒤에 망언이 뒤따르는 행태를 용납지 않겠다는 뜻이다.
일본은 이를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과거와 같은 이중 플레이도 통하지 않을 마당에 반성마저 없다면 한일 정상회담도 없다. 안보와 경제를 위해 협력이 필요하지만 분명한 반성과 재발 방지 다짐이 없다면 한일 관계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반성과 사과의 기준을 모르겠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라. 통석의 염 같은 애매모호한 수사학에 의존하는 일본과 폴란드 유대인 묘역에서 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의 서독, 같은 전범국이어도 진정성은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시계를 정확히 20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일제의 식민지배가 조선을 발전시켰다는 일본의 논리에 나라가 뒤집혔다. 요즘은 우리의 주류 학자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포장해 똑같이 떠든다. 역사 교육이 바로 서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려면 두 가지가 요구된다. 지도자의 확고한 의지가 확인된 만큼 남은 것은 하나다. 올바른 역사 교육으로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미래를 열자. 한일 정상회담 개최에는 이런 대내외 전제가 필요하다.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