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인사이드] 다이어리, 변함없는 인기 이유는…

'진실에 가장 근접한 기록' 법정서 증거로 자주 등장
'아이디어·일정 놓칠라' 종이·스마트폰 활용해 자신의 삶 기록해 남겨

2011년12월30일 임진년 새해를 이틀 앞둔 서울 종로의 한 대형 서점 다이어리 판매 코너가 2012년 다이어리를 고르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이호재기자

"이 다이어리를 보십시오. 강경선 교수가 5월 19일의 행적을 적은 수첩입니다."

지난해 11월 7일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재판에 참석한 이들은 검찰이 제시한 복사지 한 장에 주목했다. 곽 교육감이 후보자 시절 단일화 합의에 앞서 이면합의가 있었는지를 따지는 과정에서 등장한 물증은 다름아닌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에게 돈을 전달한 강경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의 다이어리였다.

이날 법정 영사기로 띄운 다이어리의 2010년 5월 19일자 칸에는'곽노현 캠프 방문/인사동 점심 김@@ 기자, 최## 교수, 이XX'라고 적혀있었다. 곽캠프의 회계 담당자인 이씨는 박명기 교수 쪽과 후보 단일화 협상을 주도한 인물로 검찰은 이 증거를 들어 강교수가 곽캠프와 후보 단일화에 따른 자금 지원을 논의했고 이 사실이 곽교육감에도 알려졌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회삿돈에 손을 댄 혐의로 중형을 선고 받은 임병석 씨앤그룹 회장의 재판에서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다. 증인으로 출석한 씨앤그룹의 관계자는 임 회장이 업무 내용을 기록한 수첩 때문에 꼼짝없이 검찰에 무릎을 꿇었던 경험 때문에 회사 공문의 결재란을 모두 없애고 포스트잇으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주요 피의자의 집이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수사당국은 확실한 기록을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고 피고인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진실에 가장 근접한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기록 자체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전제가 먼저다.

다이어리가 우리네 삶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항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내는 데는 다이어리만 한 것이 없다"는 김성준(35ㆍ회사원)씨의 말처럼 어제 혹은 그보다 오래된 하루를 떠올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연말연시를 맞아 대형 서점의 진열대 맨 앞쪽에는 다양한 다이어리 상품들이 전시돼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일상생활이 모두 디지털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다이어리에 볼펜으로 일과를 적거나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디어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왜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것일까. 다이어리, 플래너, 혹은 스케줄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수첩에 '오늘 만날 사람'과 '해야 할 일'을 적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명 서점 다이어리 판매대에서 마주친 시민들은 "매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나 하루 일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적는다(최선혜씨, 20대 여성)"거나 "회사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를 기억해야 하는데 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 휴대성이 편리한 다이어리를 산다(송모씨, 40대 남성)"는 답변을 내놨다. 손 틈새로 빠져나가는 시간을 줄이고 싶다는 의지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고픈 욕구가 다이어리를 적게 하는 셈이다.

한 때 플랭클린 플래너의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던 박원순 서울시장은 떠오르는 상념이나 읽은 책의 구절들을 놓치지 않고 적는'메모광'이다. 저서가 10권이 넘는 박 시장은 스케줄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생활하면서 자신을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이어리에 기록하는 습관이 열 권이 넘는 저서로 이어졌다는 평도 있다.

최재후 몽골 재경대학 대외협력 부총장은 삶을 기록하는 습관을 두고 "작심삼일로 큰 뜻을 품고 시작하다가 관두기도 하지만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는 힘이 된다"고 말했다.

트위터에서 만난 이들도 비슷한 속내를 털어놨다. 다만 종이에 직접 쓰기보다는 스마트폰달력이나 아웃룩 등 IT기기를 활용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정을 깜빡 잊는 경우가 있어서 꼭 적어 둔다"는 박병호 KAIST 경영대학ㆍ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최근에는 아이폰과 아웃룩을 연동해서 쓰고 있다"고 답했다. 박 교수 외에도 많은 이들이 아웃룩과 연동하는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다고 온ㆍ오프라인을 통해 밝혔다.

스마트폰의 보급과 함께 일정관리와 메모 기능을 한 번에 활용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앱)도 인기가 높다. 애플사가 선정한 올해의 앱인 어썸노트(Awesome Note)는 앱스토어 유료 앱 순위에서 항상 상위권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판매량이 높다.

어썸노트를 사용하고 있는 대학생 김경환씨는 "이제는 굳이 다이어리를 살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아기자기한 디자인을 뽐내는 '플래너 S'나 일정관리에 초점을 둔 '액션포커스' 등도 많은 이들이 선택하고 있다.

이렇듯 디지털로 갈아 탄 소비자들을 고려해 종이 다이어리 생산을 줄인 업체도 있다. 다이어리 소매 판매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모닝글로리는 생산량을 작년 대비 40% 가까이 줄였다. 매출 규모도 덩달아 줄었다. 다만 기업 특판 매출을 중심으로 꾸려가는 국내 다이어리 주요 제조사인 양지사(양지 다이어리ㆍ다루소 플래너 등)나 태성바인텍(고도 다이어리)은 "아직 큰 변화는 없다"고 답했다.

일부 유명 다이어리 업체에서는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이어리 어플리케이션을 제작해 배포하는 등 다이어리의 디지털화에 대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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