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앤 조이] 끊어진 묵객…멈춰선 시간

충남 예산 수덕사와 수덕여관
나혜석 김일엽 등 시대 앞서간 신여성 숨소리 들리는 듯
이응노 암각화 무언의 증언
한때 문인들 창작터전…초라한 자취만 남아
충남기념물 지정돼 소유권 이응노서 수덕사로

이응노의 작품으로 유명한 수덕여관 뒷마당의 암각화.


한때 문인들의 창작 터전으로 사랑 받았던 수덕여관이 지금은 찾는이들이 발길이 끊겨 쓸쓸하게 남아있다.

대웅전 앞 황금탑

[리빙 앤 조이] 끊어진 묵객…멈춰선 시간 충남 예산 수덕사와 수덕여관나혜석 김일엽 등 시대 앞서간 신여성 숨소리 들리는 듯이응노 암각화 무언의 증언한때 문인들 창작터전…초라한 자취만 남아충남기념물 지정돼 소유권 이응노서 수덕사로 예산=글ㆍ사진 홍병문 기자 hbm@sed.co.kr 이응노의 작품으로 유명한 수덕여관 뒷마당의 암각화. 한때 문인들의 창작 터전으로 사랑 받았던 수덕여관이 지금은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겨 쓸쓸하게 남아있다. 대웅전 앞 황금탑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1시간. 해미 IC를 빠져 나와 또 다시 남동쪽으로 30여분 자동차를 타고 가면 고색 찬연한 천년 사찰 수덕사에 닿는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로 꼽히는 대웅전의 명성에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수덕사 입구 일주문에 도착하면 바로 왼편에 단출한 초가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주의 깊지 않은 등산객이라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초라한 여관 한채. 일주문 앞 오솔길을 지나 투박한 돌 다리를 건너면 처마 밑에 덩그러니 매달린 수덕여관이란 간판 하나가 주인을 대신해 손님을 맞는다. 신시의 효시로 알려진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년 이른 1907년 ‘동생의 죽음’이란 시를 썼던 한국 최초의 여류 신시인 김일엽과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이 한 때 머물렀던 곳. 이곳은 지금 주인도 객도 떠나 텅 빈 폐가로 변했지만 우리 근대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두 여인의 자취가 진하게 배어 있다. 1896년 평남 용강에서 목사의 맏딸로 태어난 김일엽은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신여성이었다. 스물 두 살 나이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중년 남자와 결혼했지만 일본으로 유학한 뒤 간통 사건에 휘말려 이혼당하고 곧바로 일본 명문가 청년과 열애 끝에 아들을 낳는다. 고국에 돌아온 김일엽은 친구의 애인과 삼각관계에 빠지기도 하고 독일 유학파인 백성욱 박사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자 속세를 툴툴 털어 버리고 1928년 그녀의 나이 서른 셋에 수도생활에 들어간다. 몇 년 후 이곳 수덕사에 또 한명의 신여성이 찾아온다. 김일엽이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나섰을 때 “현실 도피를 위해 종교를 택해선 안 된다”고 충고했던 바로 그 여인 나혜석이다. 김일엽과 동갑내기인 화가 나혜석. 이미 여승이 된 친구를 만나기 위해 그녀가 수덕여관을 찾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김일엽과 비슷하다.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관료 집안 넷째딸로 태어난 나혜석은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로 유화를 공부하러 떠난다. 유학시절 사랑에 빠졌던 게이오 대학생 최승구가 결핵으로 죽으면서 파란만장 신여성의 기구한 운명이 마치 한 폭의 서사화처럼 펼쳐진다. 귀국 후 여성화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고 잡지 ‘폐허’‘삼천리’ 등에 칼럼을 기고하며 신여성 기수 역할을 했던 나혜석은 김일엽과 함께 이 두 잡지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친자매와 같은 인연을 쌓는다. 1920년 그의 나이 24살. 나혜석은 부유한 집안의 엘리트였던 김우영과 결혼하고 7년 뒤 남편과 세계 여행을 떠난다. 파리에 머물러 야수파 비시에르에게서 가르침을 받던 나혜석은 그만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하나로 프랑스를 방문했던 천도교 교령 최린과 눈이 맞는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뤄질 없는 두 사람의 사랑은 결혼 생활 파경의 빌미가 된다. 귀국 후 나혜석은 최린을 상대로 ‘유부녀의 정조를 유린했으니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하며 장안에 화제를 뿌렸지만 시대를 앞서간 이 신여인은 세상의 비웃음만 받은 채 결국 수도승이 되기 위해 수덕여관을 찾게 된 것이다. 나혜석의 굴곡 많은 인생 여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수덕사 주지 만공선사로부터 수도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한 그녀는 결국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아 다니다 1948년 12월 서울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눈을 감는다. 수덕여관 뒷마당에는 두 여인의 우정과 고락을 지켜봤을 너럭바위가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위에 새겨진 추상화 모양의 암각화(岩刻畵)는 다름아닌 화가 이응노의 작품이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청년 화가 이응노는 선배 화가를 만나기 위해 이곳을 드나들면서 나혜석과 우정을 쌓는다. 나혜석의 영향을 받아 파리로 유학을 떠난 이응노는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얽혀 옥고를 치른 뒤 석방돼 이곳에 다시 머물면서 수덕여관의 뒤뜰 바위에 암각화를 새긴 것이다. 시대를 풍미하던 세 예술가의 체취가 묻어있는 수덕여관은 한 때 그 유명세로 문인들의 창작 터전으로 사랑 받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젠 묵객들의 발길이 뚝 끊어져 폐허처럼 방치돼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수덕사 대웅전의 웅장함과 대웅전 앞뜰에 위치한 황금탑의 위용에 비춰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시대를 앞서간 두 신여성의 삶의 빛깔은 너럭바위에 끼어있는 이끼의 짙은 녹음으로 남아 아스라이 옛 사연을 전하고 있다. 한때 이응노씨의 소유였던 수덕여관은 97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예산군에서 관리를 하고 있지만 지금은 수덕사로 주인이 바뀌었다. 입력시간 : 2006/05/3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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