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산업 새길 찾을때다] (상) 해외는 '원스톱' 국내는 곳곳 '신호등'

툭하면 평가·심의… 대형 사업도 지연 잦고 비용 '눈덩이'
행정입찰외 업계서 유예·철폐 요수 규제만 44개 달해
관련부서 혁신적 통폐합·건설사 자구노력도 병행해야


서울에서 아파트 분양을 준비하고 있는 한 중견 건설업체 영업부의 A과장은 요즘 속이 타들어간다. 사업 부지를 매입한 후 자체 사업성 검토까지 마쳤지만 관련 관청의 사업계획승인이 자꾸만 늦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건설사가 착공에 나서기까지 받아야 하는 '기초평가'는 ▦교통영향평가심의 ▦개발행위심의 ▦지구단위계획심의 ▦건축심의 ▦문화재위원회심의 등 5개에 달한다. 운이 나쁘면 군사시설 보호에 대한 협의까지 거쳐야 할 뿐더러 착공 후에도 각종 심의 및 평가 등 사업지연 요소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A과장은 "잇달아 열리는 각종 심의 때문에 거의 매일 구청ㆍ시청 및 관련 부처를 쫓아다니는 데 시간을 다 보내고 있다"며 "사업 일정이 늦어지면 건설사는 그만큼의 금융비용 손해를 떠안을 수밖에 없으니 이런 것이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규제 '전봇대'가 아니냐"고 토로했다. 국내 건설사업이 여전히 '규제의 덫'에 몸살을 앓고 있다. 분양가상한제와 같은 '정책규제'는 물론이고 복잡한 서류를 요구하는 등의 '행정규제'가 각 건설사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건설회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의 대통령이 취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건설규제만큼은 속시원히 풀지 못하고 있다는 소리마저 나온다. 주택산업연구원의 장성수 박사는 이에 대해 "우리나라의 건설업은 태생적으로 규제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건설사가 먼저 생기고 관련법이 만들어진 서구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주택건설촉진법' 등 법이 만들어진 뒤 많은 건설사가 생겨나면서 '톱 다운' 방식의 규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장 박사는 "국토해양부와 환경부를 합쳐 '국토환경부'를 만드는 식의 과감하고 혁신적인 부서 통폐합이 규제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길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체감규제, '베트남보다도 많다'=건설업계 관계자들은 해외에 진출해 토목ㆍ건축사업을 해보면 국내 건설산업에 얼마나 규제가 많은지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고 입을 모은다.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ㆍ태국과 같이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마저 각종 규제완화에 박차를 가해 대규모 공사 수주의 문턱을 빠르게 낮추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베트남에서 총 7조원 규모의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GS건설은 지난 2007년 5월 호찌민시(市)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지 2년6개월여 만에 300만㎡ 규모로 개발되는 냐베신도시에 대한 투자허가승인서를 받아냈다. 한국에서 민간업체가 이 정도의 대규모 부지개발을 추진했다면 첫 삽을 뜨기까지 이보다 2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리라는 게 건설업계의 대체적 시각이다. GS건설 호찌민지사의 김지훈 차장은 "베트남에도 도시계획과ㆍ건축과ㆍ재경과ㆍ상업전기과 등 각종 인허가 부서가 많다"면서 "다만 이들 부서를 총괄하는 인민위원회가 있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한국 관공서보다 일을 처리하는 속도가 더 빠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한 대형 건설업체 관계자는 "중동 사업장의 경우 시스템은 후진적이어도 관청과 기업이 서로의 발전을 위해 일한다는 파트너십이 있다"며 "이런 신뢰감만 있어도 규제를 위한 규제는 상당 부분 없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풀어야 할 덫 '44개'=현재 우리나라 건설업계에는 얼마나 많은 규제의 덫이 도사리고 있을까. 이와 관련해 5월 대한건설협회는 '건설 관련 규제개혁과제'를 발표했다. 경기침체 속에 건설업 부활을 위한 요구사항을 담은 셈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건설업계가 한시적 유예 내지는 완화ㆍ폐지를 원하는 규제는 총 44개 항목에 달한다. 이런저런 복잡한 서류를 갖추라고 요구하거나 각종 인허가를 따내기 위해 국토부와 시군구청을 드나들게 만드는 행정절차적 규제를 빼고 정책적 규제만 모은 게 이 정도다. 법에 규정되지 않는 자의적 규제도 상당하다. 예컨대 국토부는 7월부터 청라지구 등 경제자유구역의 외자유치와 첨단 초고층 건축 활성화 등을 위해 분양가상한제를 폐지할 방침이지만 사업주체인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분양가 제한선을 따로 둘 계획이다. 건설업체가 자유롭게 분양가를 책정할 수 없도록 자의적인 '행정지도'를 하겠다는 것이다. 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 방식으로 진행되는 대형 개발사업도 분양가상한제에 발목이 잡혀 속도를 내지 못하는 곳이 한두 개가 아니다"라며 "집값 안정화라는 명분 때문에 건설사의 자율성이 훼손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공모형 PF사업 지침'은 토지공사나 SH공사 등 공기업이 시행하는 택지개발사업에서 민간 사업자가 토지를 매입할 때 잔금이 연체되면 연 12~15%의 이자를 물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의 경우 2차 토지중도금 4,027억원을 납부하지 못해 하루 1억8,000만원가량의 연체이자가 쌓이면서 공사 진행이 사실상 중단됐다. 김선덕 건설산업전략연구소장은 "그간 우리나라 건설산업의 규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폭이 넓어져왔다"며 "혁신적 규제개혁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건설사 자구 노력 병행해야=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규제완화를 위한 각종 해법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기대에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실례로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국경위)와 대한상공회의소가 공동 설립한 민관합동규제개혁추진단이 지난해 건의한 529건의 개혁안 중 336건(63.5%)이 각 정부 부처별 협의를 이끌어내지 못해 결국 수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국경위가 규제완화를 위해 지속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다 건설업 규제완화에 대한 호의적 여론도 무르익어 이제는 건설업계가 이에 호응하는 자구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강남3구 투기지역 해제나 재건축 연한 축소 등 시장에 큰 파장을 줄 수 있는 규제에 목을 매서는 오히려 부작용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상호 GS건설경제연구소장은 "집값 안정이나 환경ㆍ문화를 위한 규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며 "다만 이것만은 지키라는 최소한의 규제정책을 펴야 건설업의 자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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