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제5막> '황제'의 이별

<5막 1장> 가시면류관
30여년 '신화' 의 끝은 쓰디쓴 해외유랑

고개 숙인 패자…당당한 승자 30년 넘는 세월 동안 신화를 만들기 위해 달려왔다. 하지만 여정이 끝나는 순간, 그에게 남은 것은 머릿속 깊이 파고 들어오는 가시 면류관이었다. 그의 분신들을 워크아웃의 형장에 몰아 넣은 관료들(사진 왼쪽)은 고개 숙인 그 앞에 승자의 위용을 뽐내듯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서울경제 DB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황제'의 이별 가시면류관30여년 '신화' 의 끝은 쓰디쓴 해외유랑 김영기 기자 young@sed.co.kr 관련기사 •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전체보기] ㆍ99년8월 DJ "시장의 신뢰 잃었다" ㆍ재기위해 매달렸던 이헌재·오호근 "책임지고 빨리 거취를…" 냉대뿐 ㆍ10월 전경련 회장 사퇴후 해외로 ㆍ참담한 그룹 실사 결과에 못버티고 11월 끝내 계열사 대표이사직 사퇴 짧지 않은 인생, 그는 항상 도전자였다. 패배의 쓴 잔을 마시는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만의 '성공 방정식'을 만들기 위해 발버둥쳤다. '질주(疾走)'는 그의 본능이었고, 넓은 세상에 자신을 가로막을 것은 없다고 믿었다. 정치인이든, 외국의 거대기업인이든. 그래서 그의 경영인생에 수성(守成)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방정식은 끝내 스스로에게 올가미를 씌웠다. 그리고 성장신화가 사라지는 순간 돌아온 것은 가혹한 가시 면류관이었다. 워크아웃이란 이름의 사형이 집행(執行)되기 전날인 99년 8월25일. 김우중 회장은 이날 가장 존경한다던 김대중(DJ) 대통령과 마지막으로 마주 앉았다. 정ㆍ재계 간담회 자리였다. 많은 사람이 참석했지만, DJ는 유달리 김 회장에게 많은 말을 건냈다. 오랜 기간 ‘동지(同志)’로 있었던 사람을 보내기에 앞선 마지막 예우였을까. 고개 숙인 패자…당당한 승자 30년 넘는 세월 동안 신화를 만들기 위해 달려왔다. 하지만 여정이 끝나는 순간, 그에게 남은 것은 머릿속 깊이 파고 들어오는 가시 면류관이었다. 그의 분신들을 워크아웃의 형장에 몰아 넣은 관료들(사진 왼쪽)은 고개 숙인 그 앞에 승자의 위용을 뽐내듯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서울경제 DB “많은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결과는 수 차례에 걸친 구조조정 계획이 국내외 시장의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죠. …(중략)…진정한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 주기 바랍니다.”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는 DJ의 발언. 김 회장에 대한 믿음의 상실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을까. 신화 속 주인공에서 실패한 모델로 바뀐 환경에 그는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었다. “국가적으로 어려운 때 심려와 부담을 끼쳐 면목이 없습니다.” 통치권자에 대한 죄스러움과 서운함. 하지만 자신의 이 말이 DJ에 건넨 마지막 인사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 그에게는 이 가혹한 단어들이 너무 낯설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둘러싼 환경이 모두 바뀌었다. 세상은 벌써 그를 등지고 있었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느꼈던 유동성 위기는 그렇다고 쳐도 부실에 대한 비판이 쏟아질 때 그것은 마치 뼈 속을 파고들듯이 아팠다. 생존을 걸고 담판을 벌였던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이 가장 먼저 비수를 들고 다가왔다. 몰락의 기운이 굳어지던 8월4일 금감위 기자실. “주주로 유한 책임을 지는 동시에 경영진으로 업무상 책임이 있다면 회사가 구상권을 행사하는거야. 은닉한 재산은 없겠지만….” 부활의 불씨를 지피기 위해 몸부림을 치던 그 순간, 대척점에 섰던 이헌재는 ‘사재(私財) 배상론’을 들고 나와 그를 옥죄고 나선 것이다. 그래도 한 때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사람인데…. 책임론은 급기야 노조에까지 번졌다. 이 위원장에 이어 이번엔 대우그룹 노동조합협의회가 긴급 회동을 갖고 그를 몰아 세웠다. “출자전환으로 그룹 부채를 해결하고 퇴진해라.” 긴 여정(旅程)의 끝은 이렇게 무겁게 억누르는 책임론에 떠밀리듯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무정한 게 시간이라고 했던가. 99년 8월26일. DJ와의 해후를 마지막으로 한 채, 김 회장은 평생 가꿔온 분신(分身)들을 낯선 구조조정의 틀에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주변에는 또 다른 모습의 형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9월2일 남산 힐튼호텔. 기나 긴 유랑의 길로 떠나기 전 만난 두 사람, 이날 그 중 한 사람과 마주했다. 바로 오호근 기업구조조정위원장이었다. 오랜 인연이었지만, 앞에 앉은 오 위원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회장님 거취를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할 때 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전경련 회장을 어떻게 계속 하시겠습니까. 빨리 해결을 해야 할 겁니다.” 오 위원장은 구원을 청하러 온 김 회장을 뿌리쳤다. 부질없는 만남이었다. 살겠다는 의지는 이틀 만에 또 다른 저항에 부딪쳤다. 워크아웃 후의 극심한 혼란, 대우전자까지 한 때 부도 처리되는 등 시장이 마비되자 이헌재는 또 한번 가슴을 찔렀다. ㈜대우와 대우자동차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들에 경영을 채권단으로 사실상 넘기도록 한 것이다. 은행 관리, ‘황제의 영토’는 무심하게도 점령군에 넘어갔다. 칼날의 각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예리해졌다. 9월 중순, 어쩔 수 없이 오 위원장을 다시 찾았다. 대우차의 출자 전환 얘기부터 꺼냈다. “출자전환 비율이 너무 높습니다. 이러면 우리는 한 푼도 없는 것 아닙니까.” 출자전환 비율이 크면 감자(減資ㆍ자본금 감소)가 될 테고, 그러면 자신의 지분이 줄어 기득권이 없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김 회장은 데려온 임원 한명을 배석시키고 싶어했다. 하지만 오 회장은 2주일전 만났을 때보다 더 냉철했다. “지금 내가 김 회장과 그런 기술적인 얘기 하려고 온 게 아니요. 자리를 좀 비켜 주세요.” 오 위원장은 곧바로 그와 독대에 들어갔다.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회장님 눈치를 보느라고 담당 사장들이나 임원들의 협조가 제대로 안됩니다. 빨리 거취를 정하시지요. 과감하게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백의종군하라면 하겠다’고 선언하시는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점퍼를 걸치고 노조를 찾아 대우가 다시 살도록 당부를 하고 다녀야 하시는 것 아닙니까.” 오 위원장은 단호한 어투로 거취 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련을 지울 수 없었다. “전경련 회장 내놓는 것은 청와대와 재경부에서도 10월에 일본 게이단련하고 회의를 갖고 난 후 결정하도록 했소.” “그럼 채권단도 아닌 공직자가 회장님 면전에 대고 그런 얘길 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의 예우 차원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자꾸만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진퇴에 대한 압박 수위는 갈수록 더욱 높아졌다. 9월29일 산업자원부에 대한 국정감사장. 천정배 의원은 그를 사기죄로 엄벌해야 한다고 나섰다. “차입경영을 계속하면 도산할 줄 뻔히 알면서 큰 소리 치며 막대한 차입을 이어간 행위는 사기죄다. 채권단이 국민경제를 고려해 워크아웃을 추진하더라도 파산이나 회사정리와 같은 책임을 지는 게 정의와 형평에 맞는다.” 역사란 참 우습다. 6년 전의 그가 이제는 법무부 장관으로 심판대에 오른 김우중 전회장을 만나게 될 줄이야. 그래도. 원군은 있었다.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자동차 합작공장 설립 후 끈끈하게 얽혀진 인물이다. 10월5일 청와대, 그는 DJ를 만나 김 회장에 대한 구원을 요청했다. “김 회장을 도와달라. 같이 8년을 일했는데 굉장히 신뢰한다. 주변의 만류에도 공장을 세우는 영웅적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한번 터진 비난의 물꼬, 흘러오는 강물을 막기에는 너무 힘겨웠다. 힐튼호텔에서 열린 아시아ㆍ유럽비즈니스포럼(AEBF) 회의 개막식 후.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은 그의 전경련 회장직 사퇴에 대한 회원사 의견을 수렴하도록 지시했다. 극진하게 보필했던 손 부회장이었지만 밀려오는 압박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10월8일. 김 회장은 손 부회장을 힐튼으로 불러들여 안타까움을 담은 서한을 건네줬다. 전경련 회장직 사퇴서였다. 그간의 마음 고생이 담겨 있었다. “중책을 맡아 변화의 시대에 거듭나는 재계의 대표기구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했지만 중도에 물러나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중략)…짧은 기간 회장직을 맡아 기울여왔던 노력들은 저에게 소중한 보람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대우사태에도 신임의 뜻을 밝혀주신 회원사 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DJ와의 각별한 관계를 드러내듯, 정권 출범과 함께 재계 총수 자리에 올랐던 김 회장. 그러나 그 끝은 초라했다. 전경련 회장직 사퇴 후에도 그의 행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덜고 대우차 경영에 전념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대우차를 둘러싼 상황들은 오히려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삼성이 대우차를 인수한다는 ‘역빅딜설’이 다시 등장하더니,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이 그를 대신해 대우차를 경영할 것이란 소문까지 흘러 나왔다. 워크아웃 계획을 확정하기 위해 진행되던 실사작업은 그를 더욱 궁지에 몰아 넣었다. 관료들은 대우 임직원들이 실사에 협조하지 않고 부실을 은폐하려 한다는 의심까지 품었다. 부실 추궁을 면하고 지분이 소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업내용을 들춰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배후에 그가 있다는 것….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도 그가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한다며 퇴진을 밀어 부쳤다. 외국으로 떠나기 전 이근영 산업은행 총재에게 마지막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 총재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번졌지만 그것은 인정(人情)을 담은 것은 아니었다. “물러 나십시오.” 결국 10월11일, 떠밀리듯 유럽으로 떠났다. 아프리카까지 전전한 뒤 잠깐 귀국했지만, 중국 옌타이 자동차 부품공장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떠났다. 분신인 김태구 대우차 사장과 함께. 10월20일, 김포공항으로 돌아왔지만 곧바로 일본을 거쳐 독일로 향했다. 프랑스와 수단, 베트남을 전전하는 5년8개월의 긴 유랑 생활로 이어질지도 모른 채(기자는 출국 배경을 둘러싼 다양한 정보들을 들었지만 잘못된 오해를 부를 우려가 있어 제외한다). 출국 며칠 후 만난 오 위원장은 착잡한 표정으로 연신 담배를 물었다. 독일에 있는 김 회장에게 측근들을 통해 사퇴를 촉구했지만, 막무가내라는 것이었다.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이야. 그 양반, 대통령이 자동차 관련 6개사의 경영권을 보장해줬다는 믿음을 아직도 버리지 않아.” 하지만 버티기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항복하게 만든 것은 실사 결과였다. 25조6,000억원에 이르는 워크아웃 12개사의 자본잠식액, 여기에 채무조정액만 31조2,000억원. 대우에 빌려준 돈은 쓰레기 채권으로 변했고, 부담은 국민에 돌아갈게 뻔했다.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했다. 너무나 힘겹고 고통스러웠을까. 11월22일. 김 회장은 결국 오랜 분신인 석진강 변호사를 통해 주력 계열사들의 대표이사직 사퇴서를 전해왔다. 대우 가족들에게 보내는 회한의 작별 편지와 함께. ⇒(다음편에 계속) 입력시간 : 2005/07/10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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