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03, 2월 8-9일. 무박2일
강남역 (23:10) --- 정동진역 (3:40) 안인진3거리 (1:00) ----양재 (6:30).
등산 코스 정동진 (8:00)---- 183고지 ----당집 ------괘일재 -----괘방산 (10: 20) ------ 삼우봉 ------안인진3거리(12:00) (총 8km)
아침 6시가 되니 김하영대장께서 잠에 빠진 회원들을 깨운다. 모래사장을 산보하다 아침 식사를 하고 7시 22분 해돋이를 맞고 8시에 괘방산(掛榜山:339m)을 오르자고 일정을 알려준다.
정동진과 모래시계
94년 7월 시작한 SBS ``모래시계”에서 가련한 혜련(고현정)이가 소나무를 배경으로 바닷가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이 시청자들의 뇌리에 너무 인상깊게 박혀 이후 유명해진 역이란다.
조선시대 광화문에서 정 동쪽에 있는 나루터라 해서 붙여진 정동진(正東津). 여기서 계속 연장해 동해를 가로 지르면 일본서해안의 니이가따항, 태평양을 건너뛰면 미국의 서안의 샌프란시스코다. 애초에 이 두 항구 중의 하나에 이름을 붙여 놓았다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나 그곳을 일찍 우리 한민족이 조차지로 만들었을지도 몰랐을 거라는 망상을 해 보았다.
디젤 기관차들이 해돋이 시각에 맞추어 연신 수많은 관광객을 토해낸다. 탄광지대였던 이 곳을 석탄 실은 화차도 그렇게 자주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끝없이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와 해돋이를 보려고 구름처럼 관광객들이 모래사장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 나도 김철승사장, 김부경실장과 시원한 황태국으로 아침 배를 채우고 함께 참여했다.
남쪽으로 해안에 돌출한 높은 둔덕에 불이 환한 호화 여객선과 범선이 형님 아우하며 앞뒤로 서서 금방이라도 바다로 미끄러져 내려올듯한 모습이다. 디카로 한 컷. 해변의 분위기를 띄우느라 배모양의 숙박시설을 지어 놓은 것이란다. 옅은 어둠에서 바다와 찰떡 궁합이다. 그 뒤로는 새마을 호의 모습이 있고 안인진쪽 산기슭에 있는 비행기를 생각하면 육,해,공 모습의 시설을 다 갖춰 놓았다.
김대장님 말대로 정남이 아니라 남동쪽이 먼저 붉어지기 시작한다. 날씨는 별로 춥지 않아 그런대로 있어줄 만 한데 구름인지 해무(海霧)인지 수평선을 방해하고 있다. 해는 구름위로 솟아 오를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김 사장은 이런 것들이 혼자 오면 잘 볼 수 있던데 다른 사람하고 같이 오면 보기가 힘들단다. 보여 줄려고 하면 잘 안된다는 뜻일 게다. 그만 버스로 들어 가잔다.
역내에 ``모래시계 소나무”는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뜻으로 무릎 높이도 안되는 울타리를 해 놓았다. 구내에 있는 여느 소나무와 다를 바 없지만 드라마의 한 장면 때문에 정동진의 지가를 올려준 수훈 갑이기에 보호수로 되어 있단다. 30년생인 이 소나무가 몇 백년이 지나면 속리산의 정2품보다 한등급 더 높은 국무총리(정 1품)로 될 줄 누가 알겠나. 노 무현씨가 대통령되리라고 생각한 사람 거의 없었듯이.
정 동 진
신 봉 승
벗이여
바른 동쪽
정동진으로
떠오르는 저 우람한
아침해를 보았는가
큰 염원에서
작은 소망에 이르는
우리들 모든 번뇌를 씻어내는
저 불타는 태초의 햇살과
마주서는 기쁨을 아는가
벗이여
밝은 나루
정동진으로
밀려오는 저 푸른 파도가
억겁을 철석이는
소리를 들었는가
처연한 몸짓
열연하는 몸부림을
마주서서 바라보는 이 환희가
우리사는 보람임을
벗이여, 정녕 아는가
* * *
극작가 신봉승씨가 지은 시를 역내 플랫폼 잔디밭에
부드러운 곡선의 쑥돌에 새겨 세워 놓았다. 여기 바닷가에
서서 망망동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에 좋은 시다.
버스쪽으로 가다 멈춰 서서 보니 구름위로 이글거리는 벌건 둥근 해가 힘차게 솟아 오른다. 바라보는 사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극작가 신씨의 시가 아니라도 어느 누구라도 쉽게 느낄 수 있다.
가족끼리 온 사람도 많지만 젊은이들이 주류를 이룬다. 폭죽을 터뜨리는 젊은이들, 바다를 배경으로 장난치며 셔터를 누르는 젊은이들. 젊은이들이 제일 꼽는 여행지란 말이 실감이 난다. 그래서 나도 젊은이.
복잡한 서울의 어느 한 귀퉁이와 다를 바 없다. 숙박시설이며, 음식점, 포장마차, 노래방등 관광객이 찾을성 싶은 것은 다 있다. 운명철학관도 그 틈을 비집고 포장마차처럼 자리를 잡고 있을 정도다. 백사장 들어가기 전 새벽 고객을 맞는 포장마차에 쓰인 문구들도 재미있다. ``조개부인 바람났네.`` 압권이다. ``불붙은 조개구이.” 아차상감이다. 백사장가에도 똑같은 규격의 포장마차가 즐비하다.
분재가 된 해송이
눈이 깊이 빠질 거라는 김대장님의 말을 믿고 나는 중무장에 처음 해보는 스패츠(각반)까지 차고 대열에 끼었다. 금요일 하프 밀리언을 들여 겨울 등산복을 사 입고 온 터라 진가를 발휘할 거라는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우리 팀 외에는 산에 바로 오르는 관광객은 없어보인다.
산에 들어서자 마자 까치 두 마리가 까악 까악하며 반갑게 맞는다. (8:00) 여느 뒷 산과 진배 없고 얼어 있어야 할 흙은 질척거린다. 예감이 이상하다. 어느 사이 이상스럽다 싶게 내 키 아래로 깔리는 해송이 군락을 형성하며 계속된다. 몸통을 보면 적은 나이 같지는 않은데 마치 인공없이 스스로 분재가 되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하여튼 이들이 고산에서 강한 눈보라에 시달린 나무 맛을 느끼게 한다. 지난 가을 빨갛게 익어놓은 앵두보다 작은 둥근 넝쿨 열매도 눈에 많이 띈다. 이름은 모르겠다. 알게 되는 날이 있겠지. 어제 날씨가 푹해 얹고있던 눈을 녹여 떨어뜨려 나무아래 눈밭은 마마를 앓은 것처럼 되어있다.
이회장(솔로팀 회장님)께서 한 겹을 벗어야겠다며 배낭을 내려 놓는다. 나도 이때다 싶어 뱀 허물 벗듯 세 겹 중 한겹을 벗어 넣었다.
키 큰 소나무 서 너 그루가 서있는 빈 공터에서 선두가 기다린다. 예전의 이문동 대성연탄 공장 골목처럼 검은 흙이 드러나있다. 드라마 ``모래시계”가 있기 전까지는 이곳이 탄광이었던 지역으로 그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여기서부터 검은 흙이 눈 밑에 꽤 오래 밟힌다.
수묵 산수화
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어느 정도 올라왔나 싶다. 탁 트인 남쪽으로 산이 겹겹이 나타난다. 마치 수묵으로 그린 진경 산수화다. 높고 낮은 부드러운 능선에 나무들이 선명하게 만들어 놓은 회색 윤곽과 경사면에는 하얀 눈을 배경으로 박힌 나무들이 조선시대 화가들의 산수화를 쉽게 연상시킨다.
오리나무 군락
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꽤 넓은 오리나무 군락도 이색적이다. 조그만 솔방울을 벌거벗은 가냘픈 가지에 주렁주렁 메달고 있다. 놓칠세라 언영천사가 이들을 배경으로 서고 선희씨가 셔터를 누른다. 이회장님은 옛날 사방공사때 많이 심었던 것으로 지금 와서 보면 쓸모 없는 나무라며 KO펀치를 날린다. 오는 중 차 속에서 한말이니 다행이지 그들 곁을 지나면서 말했다면 얼마나 서운했겠는가. 사실 그들도 이미 그런 소리를 직간접으로 숱하게 들었을테지만…
그래도 자기의 요조(窈窕)함을 보아달란다. 꼭 다물고 있는 솔방울말이다. ``가을날 숱한 등산객들이 지나다니는데 쩍벌리고 있는 소나무의 솔방울과 같아요?” 뭐 큰 자랑이라고. 솔방울위로 이고 있던 눈이 노르스름한 물로 염색이 되어 나무아래로 떨어져 마치 지나가는 덜렁동포(?)들이 쌓인 눈에 실례를 해놓은 모습이다. (김형춘님의 말)
2월 건너뛴 3월 말 날씨가
계절은 벌써 3월 말쯤으로 온 것 같다. 생명이 없는 돌들도 봄기운을 흠뻑 머금어 없는 새순이 금방이라도 돋아날 것 같고, 지난 가을의 갈색 단풍을 아직 다 떼어내지 못한 참나무에는 겨울눈이 도톰하다. 며칠만 있으면 터질 것 같다. 어제 눈을 떨구지 못한 좀 높은 지대의 소나무들은 아침 일찍부터, 지나는 우리 머리위로 바람에 나뭇잎 소리 내듯 눈과 물을 떨어뜨린다. 옆 눈밭에는 미니어쳐 분화구를 숱하게 만들어 놓는다.
이 곳에 왠 당집이
몇백년은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 고목 한그루가 왼쪽 옆에 비껴서서 지나는 등산객들을 빤히 굽어보고있다. 정동진에서 3.4km 지점. 쓰고 난 긴 색색의 천이 나무에 걸쳐있는 것을 보니 당집이 가까워 보인다. 아마도 무당들이 이곳에서 기를 내려달라고 빌던 곳 일 것 같다. 산 옆구리를 지나다 보니 역시 이내 당집이 나온다. 하나 있는 쪽문이 굳게 닫힌 씨멘트 움막집이 울타리도 없이 폐허마냥 서 있어, 지나는 등산객의 발을 잠깐 붙든다. 옆벽에 낡은 헌금 현판이 걸려있다. 이회장님은 을미년을 쉽사리 서기로 환산한다. 우리가 쉽게 아는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된 해)이 1895년이고 60년만에 한번씩 돌아오는 걸 계산하면 1955년이다. 사찰에서 하는 큰 불사같지도 않은데 헌금자와 헌금 액수까지 일일이 초라한 판자에 붓글씨로 써 놓았다. 사실 여기는 태백산처럼 당집이 있을만한 산도 아닌 듯 싶다. 등산객들에게 이정표로서의 의미만 있어 보인다. 여기서 왼쪽(서쪽)으로 내려가면 동해고속도로가 지나가는 터널위 화비령(花飛嶺)이 나오고 길을 건너가면 청학산 (337m) 이 나온다. 청학산까지 2.5km.
좌초된 북한 정찰 잠수정이 괘방산을 하루 아침에…
사실 이 괘방산이 세인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지난 1996년 9월 18일 25명의 공비가 잠수정을 타고 내려와 이 곳 산 아래에 정찰조를 보내 놓고 해변에 바짝 뒤꽁무니를 대다 좌초되어 들통이 나면서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은 이런 녀석들 때문에 나온 속담같다. 새벽 1시에 한 택시기사의 신고로 추적하기 시작했는데 당일 11명이 옆 청학산에서 총으로 자살했던게 발견되면서, 한명이 체포되고, 11월 5일 마지막 정찰조 2명이 사살될때까지 우리측에도 오발 포함 17명의 목숨을 빼앗겼던 사건이다. 그 이듬해 강릉시청 등산팀이 이 곳을 안보 체험로라는 이름으로 등산 코스 둘을 만들어 놓았단다. 락가사 아래 당시 인양한 잠수정을 전시해 놓아 이 곳에 들르는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다. 물론 우리는 관광객이 아니란다.
이제는 정동진과 괘방산이 한 패키지로 되어 이 곳 강동면관광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게 되었단다.
한쪽에서는 눈이 녹아 질척이지만 북서쪽의 길에는 어김없이 눈이 다져져 조심을 해야만 한다. 현용이가 심심치않게 미끄러져 넘어진다.
벤치가 있는 곳에 이르니 김사장이 바닷쪽으로 조금 내려서서 내려와 보란다. 처음으로 해안과 멀리 바다가 잡히는 곳이다. 해변가는 모래 때문에 허연 빛이 많더니 깊어지면서 쪽빛으로 바뀐다. 보트나 요트가 한가롭게 떠 있으면 금상 첨화일텐데... 멍텅구리를 끄는 배와 화물선으로 보이는 또 다른 배가 하얀 갈기를 연신 뒤로 젖혀가며 내외하듯 비껴간다. 디카에 한 컷 담아봤다.
귀염둥이 초등생 현용이가 이정표를 배경으로 여기서 생긴 엄마 아빠를 양옆으로 함께 카메라 앞에 서며 웃음꽃을 피운다. 재롱둥이다. TV나 컴퓨터 앞에만 있고 싶어할 나이에 혼자서 등산팀을 따라다니는 걸 보면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김실장은 ``독립군”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당집에서 0.9km 정도 오르니 사거리인 괘일재에 이른다. 96년 9월 18일 우리 군이 잠수정의 남파정찰원들을 뒤쫒다 이 곳에서 한사람을 살해했다. 지금은 사격 정조준을 할 수 있도록 총밭침을 만들어 놓은 얕은 방공호 하나만 있고 그 날을 말해주는 흔적은 전혀 없다. 상당히 숨막히는 순간이었을텐데... 여기서 오른쪽 (동쪽)으로 1km정도 하산하면 7번 국도변에 있는 6.25남침 사적비가 있고 길 건너에 등명 해수욕장이다.
오솔길을 따라 눈속을 오르다 보면 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씨멘트 길이 나온다. 청계산 정상의 군시설 처럼 이곳 정상도 군 및 이동통신회사들의 송수신탑들이 점령하고 있다. 339m의 괘방산 정상. 조선 시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커다란 두루마리에 적어 이 곳에다 방으로 붙여 여러 사람에게 알렸다하여 붙은 이름이라는데 이 곳에 과거 급제하는 사람이 얼마며 보아줄 사람이 얼마길래 그랬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필 이 높은 산에…뭔가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아야 할 성 싶다.
등락 낙가사
이 눈쌓인 씨멘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이 곳의 유명 사찰 등락 낙가사가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어 뭍과 바다를 보살핀단다. 씨멘트 길을 따라 위로가다 오른쪽으로 철계단을 올라 허리를 잡아 돌아가니 목탁 소리와 함께 스님의 염불소리가 스피커에서 소리가 굵었다 가늘었다 옛날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처럼 들린다. 물론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다.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이 곳에 절을 지어 수다사 (水多寺)라 했고, 전화에 폐사된 것을 고려때 새로지어 등명사 (燈明寺)였단다. 지금 낙가사(洛伽寺)는 1956년에 재건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앞으로 크게 발전할 듯 싶다.
이름에서 우리는 관세음 보살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본디 부처님의 주무기는 ``자비.” 자비의 화신이 보살급에서는 관세음이다. 그는 인도 남쪽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에 있던 보타낙가산에 살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속초에 있는 낙산사나 이 곳의 낙가사는 보타낙가산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고 이것은 곧 관세음 보살을 봉안했다는 의미이다. 자비의 화신 관세음 보살은 빌기만 하면 소원을 잘 들어주어 한국 불교도들에게 인기가 제일 많은 보살이다. 엄마가 아들 딸 대학입시에 붙게 해달라고 빌 때도 주로 이 관세음 보살앞에서다. 부처님처럼 지존이 아니라서 말붙이기도 좋다.
그런데 이 절에는 주법당을 둘이나 가지고 있다. 위에 대웅전, 아래에는 극락전. 대웅전은 이땅에 다녀간 석가모니를 봉안한 법당으로 이 세상을 불국 정토로 만들고자 한 사람이고, 극락전은 아미타불로 과거불이다. 아미타불은 석가모니 이전 수십 억 겁에 서방 정토의 극락세계에 살면서 사람을 그 곳으로 인도하고자 했던 부처님이다. 극도의 즐거움만 있는 나라인 극락세계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믿음 랭킹으로 1,2위인 석가불과 아미타불, 그리고 제일 인기있는 관세음 보살을 모신다는 의미이니 이곳 정동진에 오는 관광객이 불심이 조금이라도 있다치면 호주머니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 말이다. 단지 내가 가보지 않아 이 세 불,보살을 확인 할 수는 없다.
삼우봉
괘방산에서 0.7km 15분 정도를 걸으니 삼우봉에 이른다. 북동쪽으로 안인진 방파제를 비롯 바다가 훤히 시야에 들어 오고, 왼쪽으로 동해 고속도로가, 북쪽으로 강릉이 한눈에 들어 온다.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다. 그런데 안개가 아직 가시지 않아 바다 멀리에는 수평선이 없이 하늘과 바다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맑아 보이는데 정말 여기서 보는데로 오염이 없을까 궁금하다. 새벽 수평선 멀리 불빛이 많치않은 걸 생각하면 고기잡이 배는 얼마 안된다는 얘기다.
이 봉우리에서 경사가 조금 심한 동쪽으로 내려가면 북한 잠수정의 침투지에 맞닥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안인진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북쪽이라서 아직도 눈이 다져져있어 조심해야했다. 이번 도착지는 공터가 있고 정자가 가에 서 있는 곳. 패러글라이딩 클럽의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는 플래카드가 하나 있다.
그런데 마당에 들어 설려는데 눈이 마구 날아든다. 양평에서 오신 원정희님, 이 회장님등이 눈공을 많이 만들어 놓고 신년을 축하한다며 오는 사람에게 던진다. 늦게 온 사람은 다들 이 눈세례를 받았다. 잠시 물도 마시고 싸온 것 을 꺼내 허기를 메웠다. 11시가 조금 지난 시각. 여기서 보니 비행기가 있을 필요가 없는 산 자락 아래에 보인다. 처음에 말한 그 비행기다.
그 길로 곧장 안진으로 향했다. 눈에 미끄러질까봐 아이젠을 했다. 막판에 방심한 사이에 사고가 잘 나는 법. 여기까지 잘 오다 넘어져 허리라도 삐끗하면 안온 건만 못한 일 아닌가. 그래서 무사히 목적지인 바닷가에 도착했다. 12시 조금 못미쳐서다. 일찍 내려온 멤버들은 버너에 불을 붙여 이미 라면등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우리도 편의점에 들어가 가지고 온 김밥과 컵라면으로 점을 찍었다. 길옆아래로 디젤기관차가 지나간다.
1시에 정확히 서울을 향했다. 고속도로로 들어설려고 강릉을 지나 는데 지난 여름 태풍과 호우가 할퀴고 간 상흔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컨테이너가 임시 집으로 되어 있는 곳, 마을이 없어진 곳, 논밭이 모래밭이 된 곳. 산사태로 씻겨내린 곳곳의 산자락. 빨리 복구되어야 할텐데... 자연은 우리에게 항상 겸허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
새로난 영동 고속도로는 어디로 뚫렸는지 알아 보기 힘들다. 꺼덕하면 터널 속을 달린다. 이번 토요일에 갈 선자령을 김회장님이 지나면서 가르쳐 주는데 감은 잡히지 않는다. 적당한 시간에 출발을 해서인지 안양팀을 군포에서 내려주고 양재역에 도착하니 6시 30분.
이 달 마지막 주 일요일은 양평 청계산에서 시산제 등산. 음식도 맛있게 하고, 돼지머리도 이쁘게 웃는 놈으로 해 금년을 기원한단다. 많은 회원이 왔으면 하는게 회장단과 멤버들 모두의 생각인 것 같다.
탈없이 돌아와 매우 기쁘다. 모든 동행자들께 감사드린다.
<채희묵 chaehmoo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