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30년 지난 외교문서 공개

동백림사건 관련자들 감형
한-서독 정상 비밀리 합의
군사원조 확대 로비하다 美와 갈등 빚기도
'전략적 유연성' 개념 70년 당시에도 제기돼

한국과 서독 정상이 동백림사건 관련자들의 감형을 비밀리에 합의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정부는 1960~70년대 미국의 군사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로비를 벌이다 미국과 갈등을 빚기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외교통상부가 30일 공개한 30년 경과 외교문서 11만7,000여 쪽을 공개하면서 빛을 보게 됐다. 이날 공개된 문서에는 1967년~1973년 동백림사건, 1975년 주한미군 감축, 한국의 유엔가입, 요도호 납치문제 등에 관한 내용이 포함돼있다.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1969년 1월 당시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대통령은 자국 외무부의 파울 프랑크 제1정치국장을 특사로 보냈다. 그의 방한 기간 중에 양국은 사건 관련자 6명을 석방 또는 감형한다는데 합의했다. 양국의 합의 내용은 당시 형확정자인 임석훈(징역 15년)씨와 박성옥(징역 5년)씨는 15일 이내에 석방하고 재판 계류중인 정규명(사형)씨, 윤이상(징역 10년)씨, 최정길(징역 10년)씨, 김성칠(징역 3년6월)씨 등 4명은 늦어도 1971년 말까지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서독은 경제협력을 비롯해 정치, 문화면에서 양국간 협력을 강화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가능한 지지를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군사 원조액을 늘리기 위해 전방위 로비를 벌이다 미국 정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포라 당시 주한 미국 대사는 1970년 3월 최규하 외무장관과 만나 “미국 국무성 입장에서 볼 때 외국정부가 미국 의회에 접촉해 로비 활동을 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이에 최 장관은 “한국정부의 최대 관심은 미국의 대 한국 군사원조 액수가 많지않은데 있다”고 응수했다. 실제로 우리 정부는 1968년 3월 주미대사에게 미국 의회에 대한 로비지침을 하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70년대 중반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관련해서는 ‘전략적 유연성’과 비슷한 개념이 당시에도 논의됐음을 보여줬다. 당시 더몬드와 스콧트 미 상원의원은 ‘아시아ㆍ태평양 병력과 정책’ 보고서에서 “미국은 (주한미군을) 타 지역에 배치한다는 점과 한국에 영구히 주둔할 수 없다는 점을 한국인에게 경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미 2사단을 태평양군사령부의 비상 대기병력으로 지명하고 때때로 훈련을 위해 타 태평양지역에 배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1970년대 중반 미국 민주당 원내 총무였던 맨스필드 의원이 만든 보고서는 당시 미 의회에서 제기된 주한미군 철수론과 대(對) 중공 화해정책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1975년 2월 보고서에서 대 중공 화해정책을 강조한 뒤 “미ㆍ중 화해로 서태평양지역에서 긴장은 해소됐으나 한국문제, 대만-중공문제로 충돌의 소지가 많다”며 “거액이 소요되는 미국의 군사시설 및 군사원조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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