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진단-④넘치는 중기지원기구「대한민국은 중소기업 천국.」
적어도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수많은 기구만 본다면 그렇다. 총본산인 중소기업청이 있고 중진공, 기협중앙회, 중소기업은행, 산업단지공단, 수출지원센타, 산업디자인진흥원, 상의, 무협, 무공, 지방자치단체….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도 기회가 있을때마다 중소기업을 살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선거때만 되면 갖가지 중소기업 지원대책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중소기업인들은 한국을 중소기업 천국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지원기구가 많고 각 기구가 나름대로 기능을 수행한다면 물샐틈 없이 도움을 줄텐데 기업인들을 만나면 『사업하기가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는 말을 더 많이 듣게 된다.
중소기업 관련기구가 많다는 것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좋은 일이다. 그만큼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비효율이다. 업무가 중복되고 그래서 오히려 중소기업을 불편하게 한다. 중소기업들이 처한 애로를 귀담아 듣고 그에 맞는 정책개발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그때그때 임기응변식 지원을 하고 있는 것도 불만이다.
지원기관의 중복=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얻어 쓴후 달러를 벌기 위해 수출이 지상과제일때 경기도에 있는 한 지자체에서는 수출지원 대책회의가 열렸다. 도지사까지 나서 수출을 독려하고 있어 지역 유관단체 담당자들이 다 모였다. 시청과 구청관계자는 물론 수출지원센터, 지역 상공회의소까지 참석했다. 이렇게 모인 사람만 20여명. 하지만 이들이 하고 있는 일은 차이가 없었다. 지원대상도 지역 중소기업으로 대동소이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나도 놀랐다. 이렇게 수출관련 지원기구가 많은지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각자 따로따로 노는 형국이었다. 서로 긴밀한 협조체계를 유지한다면 아마 반절은 없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서로 얘기하는 것도 비슷했다. 수출할 수 있는 품목을 찾아내고 금융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바이어와 상담할 수 있도록 외국어에 능한 사람을 주선해주는 일 등등.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고만고만한 아이디어로 20여명이나 되는 고급인력들이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업만 피곤하다=간판을 내걸면 실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조직의 생리다. 수출지원센터라면 어떤 기업을 지원해 얼마의 수출을 할 수 있도록 했는지 데이터를 뽑아 윗선에 보고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해당기업은 자료를 만들어 보내느라 본업인 생산에 쏟을 힘을 서류작업에 낭비하게 된다. 한 중소기업 사장은 『뭐가 그리 해달라는게 많은지 모르겠다. 종업원은 몇명이나 되느냐. 이달 매출은 지난달보다 얼마나 늘었느냐. 수출액수는 얼마냐. 직원들 독려하려고 현장에 나가 있을때도 수시로 전화가 걸려온다』고 푸념했다.
산업통계는 물론 중요하다. 향후 대책마련의 근거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지원대상을 찾아내는 데도 활용된다. 그러나 지원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연계돼 한번 만든 자료를 돌려본다면 그만큼 시간과 경비를 아낄 수 있다.
더구나 규모가 작은 기업들은 체계적인 회계시스템이 갖추지지 않아 각종 경영수치를 뽑기 위해서는 별도로 일을 해야하는 불편을 초래한다.
실무자도 괴롭다=형식적인 단체장들의 업체방문도 부담이다. 현장경제를 둘러보고 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찾겠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아랫사람들은 「얼굴내밀기」에 부산을 떨어야 한다.
해당업체도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이 사람이 한번 왔다가면 다음엔 또 다른 인사가 오고 인사챙기다 보면 정작 중요한 일은 놓친다는 것이다. 「높으신 분들」이 잠깐 동안 들러가도 업체는 준비부터 시작해 거의 하루동안 일을 못하게 되는 셈이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하급 실무자들도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요즘엔 방문할 업체들을 섭외하는 일이 제일 힘들다. 예전에는 관리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 지원혜택을 받고 싶어하는 업체 사장들이 웬만하면 부탁을 들어줬는데 지금은 「제발 우리회사는 빼달라」고 하는 통에 일을 못하겠다』는 것이 한 관계자의 토로다.
모양내기에 급급하다=각 기구간에 업무공유가 되지 않는 것은 서로가 존립근거를 과시하려는 모양내기 때문이다. 특히 작은정부를 지향하는 신정부의 방침이 공공부문에 인사태풍을 몰고오면서 이를 감지한 각 기관들이 실적만들기를 통한 「자식보호」에 매달리고 있다.
모기관 관계자는 『서로 협조하면 좋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일감이 줄 것이고 지금의 담당자들이 다른 일을 찾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감원압력을 받지 않겠느냐』는 해석을 내리기도 했다.
차후에 후한 예산배정을 받으려는 의도도 암암리에 깔려있다. 일을 하고 있다는 증빙이 있어야만 다음 연도에 이를 근거로 예산을 타 낼수 있고 따라서 서로가 돕기보다는 「내가 제일 열심」이라는 것을 내보여야 하는 셈이다.
/성장기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