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7월1일] 레빗타운

‘집, 집을 달라.’ 전후 미국이 부동산에 골머리를 앓았다. 주택이 부족했기 때문. 연평균 150만채에 이르던 신규공급이 전쟁기간 동안 거의 중단된 후유증이다. 결혼했거나 적령기인 제대 군인들의 불만이 특히 컸다. 주택 문제가 사회적 불만으로 번지기 직전, 일이 풀렸다. 저가의 교외주택이 대량 건설된 덕분이다. 시발점은 1947년 7월1일. 유대계인 윌리엄 레빗(당시 40세ㆍWilliam Levitt)이 맨해튼 40㎞ 외곽에 1만7,447채의 단독주택을 지으면서 비롯됐다. 한해 평균 4채를 짓던 다른 업자와 달리 레빗은 하루에 40채의 주택을 찍었다. 비결은 분업. 각 분야의 전문인력이 컨베이어벨트처럼 이동하며 뚝딱 집을 만들어냈다. 색깔별 페인트공을 따로 둘 정도였다. 레빗의 주택은 무엇보다 가격이 쌌다. 대지 150평, 건평 22평 주택이 7,990달러. 4인 가구의 평균소득이 연 6,808달러이던 시절이다. 분양조건으로 흑인에 대한 재매각 금지라는 단서를 달았어도 레빗에게는 찬사가 쏟아졌다. 제2, 제3의 레빗타운이 생기고 다른 업자들도 모방에 나서 미국 전역에 백인 교외주택이 깔렸다. 붙박이장과 냉장고ㆍ가스레인지 등 기본 품목으로 들어간 내장품은 가구와 가전 등 관련산업의 호황도 이끌었다. 캐리어가 개발한 에어컨이 대중화한 것도 레빗타운의 기본사양으로 채택된 1950년 이후다. 서민단지로 시작한 레빗타운은 오늘날 중상층 주거지역으로 꼽힌다. 침실 6개짜리로 개조하고도 마당이 넉넉하다. 책자나 문서자료에 나온 가격은 5만~15만달러. 거품 탓인지 온라인으로 확인한 시세는 50만달러 이상이다. 평생 동안 주택 14만채를 지은 레빗은 말년에 쫄딱 망했다. 몇몇 아프리카 국가에서 주택사업을 벌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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