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노동자들이 BMW 뮌헨공장에서 자동차를 조립하고 있다. 수출 주도형경제인 독일은 올들어 세계 경기 급랭으로 자본재 등 주력 수출 품목의 수요가 줄면서 급격한 성장률 감소가 예상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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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영국 등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의 윤전기는 밤낮없이 쉴새없이 돌아가고 있다. 중앙은행 역사 이래 가장 바쁜 순간이다. 이달 초 G 20(주요 20개국) 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은 지난 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글로벌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5조달러 규모의 재정지출에 합의했고 이들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찍어내야 하기때문이다.
글로벌 위기의 진앙지인 미국의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은행 구제금융에다 수천억달러의 국채매입을 하느라 2조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다.
이같이 전세계가 발등에 떨어진 경기부양을 위해 엄청난 유동성을 방출하고 있지만 노골적인 반기를 들고있는 국가가 있다. 바로 유럽의 제 1 경제 대국인 독일이다.
독일 정부는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유동성이 방출될 경우 향후 글로벌 초인플레이션이라는 부메랑이 전세계를 덮칠 것이라며 추가적인 재정 지출을 통한 경기부양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G20 정상회의가 끝난 직후 "돈이 너무 많이 풀렸다가 거품이 터지면서 발생한 현재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또 다시 돈을 풀어 해결하려하고 있다"며 "이는 미봉책에 그치고 향후 초인플레이션이라는 더 큰 재앙에 직면할 것이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미국은 물론 유럽연합(EU), 일본 등 세계 주요 경제권의 소비, 산업생산, 실업률 등 주요 지표들이 바닥 모르게 추락하고 이에 따라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 현상이 심화하면서 독일은 경기부양에 나서라는 세계 각국의 요구를 계속해서 거부하기 힘든 국면으로 내몰리고 있다.
◇급감하는 수출 물동량=특히 독일은 국내 총생산(GDP)의 47%를 수출에 의존할 정도로 수출 주도형 경제구조를 띠고있어 세계경기가 추락하면서 어느 국가보다도 심각한 타격을 받고있다.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수출 비중은 13%에 그치고 수출 주도형 경제라는 일본도 20%가 채 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독일이 얼마나 수출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영국 등 주요 국가는 물론 독일 일각에서도 자국 수출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전세계적인 재정지출 확대 공조에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독일 뒤스버거 하펜 항구에서 수십년간 물류 사업을 해온 스타케씨는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수출이 나름대로 선방하면서 선적장에 5겹 이상의 컨테이너가 쌓여있었다"며 "하지만 올들어 수출경기가 급격히 후퇴하고 물동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현재는 컨테이너가 많아야 2겹 정도밖에 되지않는다"고 말했다.
독일 수출 중 40% 이상이 주로 동유럽이나 아시아 국가로 이동하는 기계 장비 등 자본재다. 자본재는 경기가 수축될 경우 가장 먼저 투자를 줄이는 분야다. 수출이 줄면서 독일 산업생산은 지난 1월 전년비 20% 이상 감소했고 해외로 수출되는 자본재는 절반 가까이나 줄어들었다.
◇일본식 '잃어버린 10년' 우려도=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 주 독일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주요국 중 최악의 수준인 -5.3%로 예측했다. 이는 글로벌 위기의 진앙지인 미국(-4%)과 영국(-3.7%)보다도 안좋은 수치다.
프랑크푸르트 소재 코메르즈방크의 요르그 크라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올들어 수출 경기가 예상 외로 급락하고 산업생산이 빠르게 축소되고 있다며 -7%까지 성장률이 내려갈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독일 정부에 위안거리이던 실업률도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고있다. 지난 9월 7.6%이던 실업률은 이후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더니 올들어 지난 3월에는 8.1%까지 올랐다. 하지만 실제 실업률 수치는 10%에 안팎이라는 비관적 분석도 나오고 있다.
경기침체에 대응해 기업들이 조업시간을 단축하고 일자리를 나누는 방식으로 실업을 최소화하고 있지만 향후 경기침체가 지속될 경우 대량 정리해고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잠재 실업률은 더욱 높을 것이란 얘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난 90년대초 자산 버블이 붕괴하면서 일본이 겪었던 장기불황인 독일판 '잃어버린 10년'이 닥치는게 아니냐는 우려감마저 나오고 있다.
◇기로에 선 독일 정부=하지만 독일 정부는 주요국의 재정지출 확대 요구가 '언 발에 오줌 누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게 현재까지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전세계적으로 돈은 풀릴대로 풀려 경기 회복심리만 살아나면 초인플레라는 재앙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게 독일 정책 당국자의 판단이다.
사실 경기부양과 금융부실 해소를 위해 수조달러의 돈을 푼 미국조차도 향후 발생할 인플레를 우려해 중앙은행이 나서 수천억달러의 통화안정증권 매각을 추진하는 인플레를 막기위한 예비적 조치를 취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도 최근 "독일은 2010년까지 2년간 국내총생산의 4.7%에 달하는 재정 지출을 추진할 정도로 충분히 경기부양을 하고 있다"며 "더 이상의 재정 확대를 필요없다"고 못을 박았다.
독일 시사 주간지인 슈피겔은 최근 "최근의 G20 회의가 재정확대를 합의하며 안정, 성장, 고용을 이끌 수 있는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자화자찬했지만 빚 실업 인플레이션을 야기하는 전환점이었다"고 비판한 것도 이 같은 독일의 분위기를 대변해준다.
독일 내부적으로는 글로벌 경제위기를 촉발한 부동산 시장이 버블로 급락한 것도 아니고, 가계와 기업이 과도한 부채로 허덕이는 것도 아니다. 전문가들은 독일 내부 경제구조로 볼 때 경기침체를 당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일본의 올해 경제 성장률이 -6%로 전망되는 등 세계 경기가 지난 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으면서 독일 정부는 재정 지출 확대라는 카드를 갖고 고민에 휩싸여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세계 경기의 바닥을 기대하며 독일 수출 경기가 다시 회복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글로벌 경기침체가 장기화할 경우 독일로서도 국내 경기를 살리기 위해 재정확대 등 특단의 카드를 내놓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