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를 지적인 교묘함으로 풀어내는 보르헤스식 글쓰기 방법은 ‘글을 쓴다’라기 보다 ‘글을 짠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시간과 공간의 씨실과 날실을 언어라는 날렵한 바늘로 직조하듯 그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 존재한 11세기의 오마르 하이얌과 19세기의 에드워드 피츠제럴드를 연결하거나(‘에드워드 피츠제럴드에 관한 수수께끼’) 몽고의 황제 쿠빌라이 칸과 영국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가 수 백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동일한 소재를 공유하는(‘콜리지의 꿈’) 점을 포착해 낸다. 남미문학의 거장이자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보르헤스의 에세이집 ‘또 다른 심문’(1952년작)이 국내 처음으로 번역 출간됐다. 35편의 글을 묶은 책의 표제작인 ‘만리장성과 책들’은 제국의 공간적 경계였던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과거와 기억이라는 시간적 기록이 담긴 책들에 대해 ‘분서갱유’를 시행한 시황제에 대한 단상. 시간과 공간의 연속을 부정하고 기존의 관념을 비틀어 버리는 보르헤스의 수법이 책 전반에서 펼쳐질 것임을 암시한다. 짤막한 에세이들은 너대니얼 호손, 오스카 와일드, 카프카, 존 키츠 등 거장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며, 고대 및 중세 철학자들은 물론 버클리ㆍ스피노자ㆍ쇼펜하우어 등 다양한 철학자를 등장시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의 결합과 통찰력을 보여준다. 보르헤스는 이 책으로 1956년 아르헨티나 국민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