寫眞을 암실 밖으로 끄집어 낸 두 사내

구본창-인간 의식 深淵에 존재하는 형상 표현
배병우-바다·산 토속적 풍광으로 국제적 명성

배병우

구본창

구본창作 '태초에 1'(In the Beginning 1) 135 x 95cm, 제작년도 1991 면으로 짜인 천위에 젤라틴 실버기법으로 인화(gelatin silver photographs, cotton thread)

배병우作 소나무 120*240㎝ 제작년도 2003년, 인화지 젤라틴실버 기법. 경주 소나무 숲에서 촬영한 것으로 팝 가수 엘튼존이 구입해 유명해진 작품이다.

寫眞을 암실 밖으로 끄집어 낸 두 사내 구본창-인간 의식 深淵에 존재하는 형상 표현배병우-바다·산 토속적 풍광으로 국제적 명성 우현석 기자 hnskwoo@sed.co.kr 배병우 구본창 관련기사 • 부산영화제 개막 '영화바다' 속으로 • 바라만 봐도 효과 마술같은 '원예치료' • 라스베이거스, 이젠 '공연의 파라다이스' • [김재영의 강한 남성 만들기] 과중한 스트레스 '섹스리스' 원인 1837년 프랑스의 화가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는 어두운 상자(暗箱子)속에 맺힌 화상을 은판(銀板)위에 기계적으로 정착시키는 방법을 발명했다.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이라고 불린 현상 방법은 이를 토대로 보다 정밀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사진이라는 이기(利器)를 인류에게 선사했다. 사진을 발명한 사람이 화가였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애초에 사진과 미술은 한 몸이었다. 하지만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탄생한 사진은 그 목적과는 정반대의 영향을 미술계에 끼쳤다. 카메라로 실물과 똑 같은 모습을 재현할 수 있게 되자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주된 임무중의 하나였던 화가들은 할 일이 없어졌고, 심심해진 그들은 딴 생각을 품게 됐다. 화가들은 사물을 그리는 대신 자신의 머릿 속에 있는 생각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후 미술계에는 사실적 묘사를 저버린 야수파와 입체파가 출현하며 새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 아울러 기록의 도구로만 머물 것 같았던 사진도 점차 예술적 표현을 시도했다. 19세기 말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이미 예술 사진이 붐을 이뤘고, 드가 같은 인상파 작가들은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1920년대부터 사진이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근대 사진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티글리츠(Stieglitz, Alfred)가 불씨를 지폈고, 60년이 흐른 1979년 타임지 표지에 안셀 아담스(Ansel adams)의 풍경사진과 뉴스위크에 리처드 아베돈(Richard Avedon)의 패션사진이 실리며 사진 붐이 일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미술시장에서 사진의 거래가 활발해진 것은 80년대 후반부터였다. 88년 워커힐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적 ‘사진 새시좌전’이 반향을 일으켰고, 구본창ㆍ배병우ㆍ김승곤이 주축이 돼 전시했던 90년 ‘한국사진의 수평전’에는 워커힐미술관 개관 이래 가장 많은 관객이 몰려 사진의 높아진 위상을 과시했다. 미국에서 사진의 위상이 제고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에서도 서서히 사진이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트렌드는 젊은 사진작가들이 주도했다. 그 중에서도 두 명의 사진가 구본창과 배병우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구본창은 의식의 심연(深淵)에 존재하는 모습을 표현하는데 주력했고, 역시 독일에서 연구생활을 했지만 주로 국내에서 활동을 했던 배병우는 소나무, 바다와 같은 한국적 정서의 묘사에 천착했다. 작품세계는 판이했지만 구본창과 배병우는 한국 사진의 새 흐름을 함께 주도했다. 이후 김영수, 김중만 등이 합류하면서 누드와 풍경 등 살롱풍 사진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이들은 국내에서 보다 외국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고, 해외에서 얻은 인기를 몰아 국내의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각인 시켰다. 이번 주 리빙앤조이는 한국의 사진을 어두운 암실에서 끄집어내 세계에 알린 사진계의 쌍벽, 구본창과 배병우의 작품세계로 떠나는 여행이다. 구본창作 '태초에 1'(In the Beginning 1) 135 x 95cm, 제작년도 1991 면으로 짜인 천위에 젤라틴 실버기법으로 인화(gelatin silver photographs, cotton thread) 대기업 그만두고 독일유학 "동영상 시대에 상투적 테마는 한계" 창작서 전시기획까지…사진 위상 제고 '종횡무진' 막연한 꿈을 위해 자신이 향유하고 있는 현실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아마도 겨우 배고픔을 벗어나기 시작했던 70년대라면 그 같은 시도는 더 더욱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30년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당시만 해도 잘 나가던 굴지의 대기업 대우에서 근무를 하던 구본창은 안정된 현실 보다 불확실한 꿈에 모든 걸 걸었다. 그리고 그는 독일로 유학을 떠나 함부르크 국립 조형미술대학교에서 사진디자인을 전공했다. 그 때만 해도 학부시절 전공이던 경영학이나, 대기업에서의 샐러리맨 생활은 그가 떠안고 나가야 할 사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창작과 기획을 시작했을 때 그의 전력(前歷)은 한국 사진계의 구획을 정리할 자양분이었다. 이런 이유로 사진평론가 진동선은 "구본창이 단순한 사진작가 이상인 것은 그가 한국 사진의 격동기인 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오면서 뿌린 씨앗과 거둔 결실이 단순한 작가의 역량을 뛰어 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작품, 전시, 기획 등 사진과 관련한 구본창의 역량을 평가하는 대목이다. 그의 작품세계 역시 종횡무진이다. 주제와 소재가 한 곳에 머물지 않으면서, 표현 기법도 다양하다. 사진이라는 사실적인 표현 도구로 그려내는 그의 작품세계는 보는 이의 상상력을 보고 즐기는 사진에 안주하도록 놓아두질 않는다. 이 같은 기자의 지적에 그는 "그렇다고 내가 사실적인 사진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구본창은 자신의 작품세계와 관련"사진의 추상성은 영상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했기 때문에 새로 나타나는 성향"이라며 "지금은 CNN같은 방송사가 동영상으로 전쟁을 중계하고 있는 세상이라 일상적인 테마를 찍는 사진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예술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단순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진을 찾고, 또 표현하는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는 얘기다. 그는 "이를테면 작품 '태초'시리즈는 남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거미줄에 갖힌 듯 한 형상을 통해 억압된 현대인의 고뇌를 표현했다. 그 같은 고뇌를 가진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 사진의 메시지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백자의 경우 소박한 매력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그가 관객과의 교감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사진이 어렵다면 관객들에게 설명해줄 수 있을 만큼은 해줘야 한다.나도 미술을 공부할 때 현대 작가들의 그림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공부하다 보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풍경사진이나 보도사진은 편하게 볼 수 있는 반면 추상적인 사진은 한 단계를 뛰어넘으면 다른 세계가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본창은 고등하교 시절 미술을 빠져들었다. 하지만 대학입학을 앞두고 열린 가족회의에서 '미술을 하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중론에 따라 그는 연세대학교로 진학해 경영학을 전공한다. 월급쟁이로 적응해 가던 와중에 고등학교 동창 배창호가 그에게 바람을 넣었다. 현대그룹에 근무하던 배창호가 영화를 하겠노라며 회사를 때려 치우고 이장호 감독 밑으로 간 것이다. 그걸 본 구본창도 마음이 동했다. 그는 독일로 떠났고, 그 곳에서 사진을 공부해 돌아왔다. 그의 예술적 재능에 사진의 체계와 이론적 틀이 장착됐고, 핏속을 흐르던 개성사람의 DNA는 합리적 매니지먼트로 발현됐다. 전시 기획과 작품 판매에 잇따라 성공을 거두며 예술과 돈을 엮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그를 추진해온 원동력은 역시 '작품에 대한 열정'이라는 것이 그의 말에 묻어난다. "사진을 너무 쉽게 찍으면 감동이 오지 않는다. 대상물에서 감동을 받아야 사진에 에너지가 담긴다. 피사체와 교감이 없는 사진이 제3자에게 감동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눈으로 느끼는 감동이 사진으로 안 올 수도 있고, 필름에 담긴 감동이 사진으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추어가 찍어도 그런 좋은 사진이 있을 수 있지만 아마추어는 그런 품질을 유지할 수 없을 뿐이다. 그것이 작가와 아마추어의 차이다. 프로는 그런 좋은 사진을 골라 낼 수 있는 무당 같은 끼가 있는 것이다" 배병우作 소나무 120*240㎝ 제작년도 2003년, 인화지 젤라틴실버 기법. 경주 소나무 숲에서 촬영한 것으로 팝 가수 엘튼존이 구입해 유명해진 작품이다. 94년 소나무展에 日열도 경악 경주 숲서 찍은 소나무 사진 엘튼 존이 3,800만원에 구입도 배병우의 전공은 디자인이다. 그는 74년 홍익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는 필수 과목중 하나였던 사진에 심취했고, 대학시절 내내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누볐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그의 눈에 비쳐진 산하의 풍광은 오늘 이 순간까지 그의 작품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구본창이 경영학을 전공한 것 처럼, 배병우도 사진을 전공한 작가가 아니다. 당대의 두 거장이 사진 전공자가 아닌 것이 재미있어 미술과 사진작업의 연관성을 묻자 그는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사진이 필수과목 이었다. 디자인이나 회화를 전공했다고 사진과 무관하다고 보는데, 평면 미술은 같은 맥락이다. '물감으로 그리느냐', '빛으로 그리느냐'의 차이다. '시각디자인 전공한 사람이 왜 사진을 했냐'고 묻는 것 같은데 그 과목이 내 전공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 친구 안상수는 문자도안을 잘해서 그것을 한 것이다. 독일은 단과대 안에 모든 학과가 개방돼 있다. 그게 바람직한 것이다. 1,2학년 때는 열어놓고 3,4학년 때 섹션을 나누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덧붙여 "사진 작가 살가도(Sebastião Salgdo)는 전공이 경제학이다. 그는 카메라를 든 저널리스트고, 나는 카메라를 든 아티스트다. 카메라는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도구로 해석해야 한다. 나는 화가들이 그림으로 표현하는 바다와 집, 오름(산을 지칭하는 제주도의 방언)을 카메라로 표현한 것 뿐이다. 사람들은 사진을 볼 때 찍는 행위만을 생각하는데, 그건 매체의 정의를 모르는 것이다. 카메라는 '눈의 확대된'(Extension of eye)개념이다. 사진과 미술을 별개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체로서의 사진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풍경에 천착하던 배병우는 종묘를 찍었고, 바다를 찍었고, 제주도의 오름을 찍었고, 소나무를 찍었다. 그의 소나무 사진중 하나는 팝스타 엘튼 존에게 무려 3,800만원에 팔려 한 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지난 봄 소더비 경매장에서 1,000만원이 더 오른 4,800만원에 낙찰됐다. 소나무와 오름, 바다, 산을 찍게 된 배경에 대해 묻자 그는 "바다는 내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고, 제주도는 80년대부터 다녔다. 제주도는 산과 수평선과 계곡이다. 나는 원래 바다에서 시작했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에 천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소나무다. 그가 94년 일본 3대 경승지인 마쓰시마(松島)를 방문했을 때 소나무는 다 죽고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벚나무, 대나무 사진집은 수백권이 있는데 소나무 사진집은 한 권도 없었다. 일본은 배병우의 사진을 보고 경악했고, 한번의 전시로 그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그때부터 그는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팔린 이후 한국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기자는 소나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그의 메시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물었더니 "보고 즐기면 된다. 무용하는 사람은 소나무를 댄서라고 하고, 어떤 이는 뱀 같다고 한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좋은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래서 음악이나 무용하는 이들이 공연때 쓰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흔쾌히 허락한다"고 했다. 구본창에게 물어봤듯이 배병우에게도 물어 볼 질문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느냐"는 미련한 질문을 던지자 그는 "잘 찍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카메라는 도구다. 도구 사용은 1년이면 익힐 수 있다. 서예나 동양화는 젊은이가 대가가 될 수 없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도구를 이용하고 빛을 이용하는데 최소한 10년은 걸려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잘 찍는 방법에 관해 던진 기자의 질문은 배병우의 진한 아쉬움으로 이어졌다. "살가도가 경제학자가 아니었다면 그의 대작이 나올 수 있었겠나. 살가도 사진은 프린트도 뛰어나다. 그 여운을 봐라. 애절한 여운이 남고, 상승효과가 일어난다. 작가의 배경이 중요한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 일생을 투자해야 한다. 그러니 예술가가 돈 벌이가 되겠나. 한 10년 하다 지치면 손 든다. 그러니까 팔아 먹을래야 팔 사진이 없는 것이다. 너나 없이 모두 중간에 기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남준이 위대한 것이다. 우리 역사상 백남준급 아티스트는 없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에 어울렸던 내 또래 중 비슷한 수준의 작가가 30명만 됐더라면 그 중에 거물이 한 명은 나왔을 것이다" 한국사진의 쌍두마차 구본창과 배병우를 빼 놓고서 한국현대사진을 말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두 사람이 바로 사진을 오늘의 모습으로 있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1950년에 태어난 배병우는 전후 세대 맏형으로서, 그리고 좌장으로서 보이지 않는 한국사진의 힘이 되었다. 1953년에 태어난 구본창은 한국현대사진에 꼭 필요한 중요한 일들을 일궈낸 견인차였다. 때론 라이벌로서, 때론 동지로서 선장과 항해사가 되어 역사적 순간에 한국사진의 방향타가 되었다. 두 사람의 업적 가운데 몇 가지만 말해 보자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한국사진의 국제화이다. 한국사진이 세계로 나아가고, 세계가 인정하고 그리하여 가치에 따른 정당한 평가를 부여받는 데 두 사람의 공헌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하면서 한국 사진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두 사람의 폭 넓은 인적, 물적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한국사진의 국제화, 세계화는 구호였거나 희망이었을 것이다. 다른 또 하나는 사진문화의 확장이다. 사진이 미술과 소통하고 미술관의 벽을 허물 수 있었던 데는 두 사람의 힘이 지대하다. 또 당당하게 예술품으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고 소장품으로서 자리할 수 있었던 데도 두 사람의 역할이 지대했다. 두 사람의 사진은 시장신뢰의 기반이었다. 두 사람이 사진 시장의 쌍두마차가 되어 사진의 품격을 지속적으로 끌어 올리는데 이바지했다. 마지막 하나는 사진의 확고한 위상 정립이다. 어쩌면 이것이 두 사람의 가장 큰 업적일지 모른다. 이 땅에서 사진이 미술과 동등하게, 아니 바로 지금 현대미술의 떠오른 중심으로서 너무도 크게 위상이 증대된 이면에는 두 사람이 지난 20년 동안 힘을 합해 일궈낸 역사적 터닝 포인트들이 있었다. '한국사진의 수평전'과 같은 역사적 전시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한국사진은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존재가 곧 한국현대사진의 존재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이다. 입력시간 : 2006/10/1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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