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수필] 시대의 선각자 金在益

崔禹錫(삼성경제연구소 소장) 얼마전 우편으로 책이 한권 왔다. 「시대의 선각자 김재익(金在益)」이라는 책이었다. 고(故) 김 수석의 부인 이순자(李淳子)교수가 엮어 생전 고인을 잘 아는 분들께 돌리는 것이라는 인사장이 들어 있었다. 아웅산 사건이 난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15년이 됐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낀다. 고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과는 업무상 접촉이 많았다. 처음 본 것이 신문기자로서 경제기획원에 출입할 때였는데 무척 맑고 순수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엇이든 비판적으로 보는 신문기자를 상대로 논리정연한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부드럽고 온화한 성품 뒤에 무서운 정열과 집념이 불타고 있는 줄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때 고인은 남덕우(南悳祐)부총리 밑에서 비서실장과 기획국장을 하고 있었다. 글로벌스탠더드형인 고인이 기존 관료시스템 속에서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더러 고인의 방에 들리면 한국경제의 낙관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한번 읽어보라고 책을 주곤 했다. 그 책 중에 하나가 루드비히 폰 미제스의 「자본주의 정신과 반자본주의 심리」였다. 고인의 정열과 역량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청와대에 들어가고 난후다. 라인조직보다 비교적 소신껏 일할 수 있는 경제수석 자리가 적격이었다. 파격의 발상을 펴기엔 5공 초의 비상시가 좋았는지 모른다. 그땐 신문사 경제부장을 할 때였는데 옆에서 보기에도 파격적인 일들을 많이 했다. 일찍이 자유화·국제화 정책을 밀고 나가 기존 관료층과 마찰도 많았다. 처음엔 그들을 설득하다가 정 안되면 아예 사람을 바꿔버렸다. 일을 위해선 무서운 신념을 드러내곤 했다. 이때 대대적으로 추진한 것이 물가 한자릿수 잡기였다. 한번은 경제부장들을 삼청동 엔지니어 클럽에 초대했다. 그리곤 바로 지금이 한국역사상 획기적 순간으로서 여러분들 하기에 따라서 나라 흥망이 결정된다고 역설했다. 서두가 너무 거창하여 모두들 긴장했는데 이야기인즉 한국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선 물가 한자릿수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걸 위해선 금리와 임금을 한자릿수로 내리고 추곡수매가와 정부예산도 동결해야 하는데 언론의 절대적 이해와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때 확신에 찬 목소리와 몸짓엔 종교적 엄숙함이 있었다. 이런 김수석의 순수한 정열과 전두환 대통령의 전폭적 지지가 있었기에 80년대 초의 안정화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수석은 일엔 무서운 집념을 보이지만 매너는 무척 부드러웠다. 시퍼런 개혁 작업을 추진하면서도 재거나 욱박지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같이 끌고가려 했다. 한번은 KDI와 경제부장들의 경제토론회가 유성온천에서 열리자 거기까지 김수석이 달려왔다. 토론회가 끝나고 골프를 치게 됐는데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하며 골프를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골프가 끝나고 목욕탕에 들어가니 거기 김수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대통령의 분부도 있고 하여 몇번이나 골프를 배우려고 연습장에 갔지만 소질이 없는지 잘 안된다고 하면서 골프 잘치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잘 치지는 못해도 여러분들과 같이 칠 정도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수줍게 말하는 것이었다. 얼마 안 있다 아웅산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김수석과는 영원히 골프를 못했다.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운데 모두들 눈치보는 세태가 될수록 사심없이 전력투구하던 김수석이 생각난다. 마침 10월 9일 기일을 맞아 고인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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