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2월6일, 프랑스 우익연맹이 주도한 시위대 수만명이 국회의사당으로 모여들었다. 명분은 ‘금융 스캔들 진상규명’이었으나 목적은 중도좌파 정권의 전복에 있었다. 일부 시위대는 무장까지 갖췄다.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된 시위는 피를 불렀다. 1871년 파리 코뮌 이래 63년 만에 발생한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총격으로 17명이 죽고 1,435명이 다쳤다는 소식에 급진공화파 정권이 ‘더 이상 질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됐다’며 물러났다. 대신 보수당 정권이 들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2년 동안 다섯번이나 정권이 바뀐 상황에서 프랑스의 정국은 더욱 혼미해졌다. 당장 공산당이 주도한 9일의 반대시위로 9명이 목숨을 잃었다. 12일에는 프랑스 전역이 우익 파시즘에 반대하는 시위로 뒤덮였다. 반목해온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이 손잡은 것은 물론 왕정복고를 꾀하던 일부 우익단체에 맞서 공화정 수호를 기치로 내걸었던 급진공화당까지 힘을 합친 결과는 1936년 총선에서의 좌파 압승. 서구 최초로 주40시간 노동, 군수ㆍ항공산업 국유화 조치를 취했던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가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인민전선의 태동은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베트남 민족운동을 자극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좌절했던 우익연맹의 핵심조직은 2차 대전 때 독일의 괴뢰정부였던 비시 정권에 협력해 종전 이후 ‘반역’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프랑스에서 좌파정권이 전통적으로 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시 프랑스의 민심을 격동하게 만든 최대 원인은 경제난. 세계적인 불경기 속에서 회복기에 들어섰다는 1938년의 생산은 대공황 직전과 비교해 20%에도 못 미쳤다. 인구증가율도 유럽에서 가장 낮아 노인인구가 많은 나라로 꼽혔다. 정치불안에 경제난ㆍ고령화까지 남의 일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