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지난 6월26일 열린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월드컵 경기 주심인 발렌틴 이바노프를 혹독히 비판했다. 그는 16장의 옐로카드를 꺼내 들며 경기흐름을 자주 끊은데다 무려 4명의 선수를 퇴장시키는 진기록을 남겼다.
경기 중 주심은 저승사자나 다름없다. 선수에게 멈추라고 하면 멈춰야 하고 경기장 밖으로 나가라면 나가야 한다. 항의도 지나치면 옐로카드다. 그렇다고 고분고분한 선수는 찾아보기 어렵다. 유명세가 붙은 선수일수록 더 그렇다. 지네딘 지단은 대한민국과 프랑스 경기 후반에 슛이 무위로 그치자 화가 나서 우리 선수를 밀었고 주심은 가차없이 옐로카드를 꺼냈다. 그는 경고누적으로 토고와의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를 벤치에서 지켜봐야 했다.
공정성 만큼 원활한 진행도 중요
경기는 이겨야 한다. 팀으로도 그렇고 선수 개인으로도 그렇다. 이겨야 한 게임 더 뛸 수 있고 더 유명해지고 수입도 덩달아 올라간다. 우선 몸싸움에서 밀리면 끝이다. 밀고 잡아당기고, 팔꿈치로 치고, 심하면 스파이크로 상대선수의 얼굴을 밟는다. 말 그대로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 경기장이다.
주심의 역할은 경기를 공정하게 진행하는 것이다. 실력이 나은 팀이 경기에서 이겨야 한다. 운이 따르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비열한 방법으로 이기는 것을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하지만 모든 비신사적인, 비열한 방법을 하나하나 정확히 규정하기는 어렵다. 모든 규칙을 완벽하게 집행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다. 업사이드ㆍ페널티킥의 기준이 정해져 있지만 순간적인 동작을 포착해 판정을 내리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모호한 판정이 골로 이어지기라도 하면 실점한 팀과 팬으로부터 오심이니 편파 판정이니 하는 비난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주심이 보지 못한 반칙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즘은 경기장 안팎으로 설치된 수십 대의 카메라가 지나쳐버린 반칙들을 잡아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선수들의 손놀림ㆍ발놀림을 일일이 비디오에 담아 이미 내려진 판정을 번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란과의 시합에서 포르투갈의 루이스 피구가 뺨을 찢겼지만 주심은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다. 만일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키고 피구에게 상처를 입힌 선수가 누구인지 밝히려고 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결과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일단 주심의 판정이 내려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공정한 진행 못지않게 원활한 진행과 재미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심에게 재량권이 주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공을 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부딪친 경우와 고의로 상대 선수의 옆구리를 가격한 경우는 구별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태클은 눈감아주고 어떤 태클은 호각을 불어야 할 것인가, 프리킥만 줄 것인가 아니면 옐로카드를 꺼낼 것인가’ 하는 판단은 주심에게 달렸다. 이런 의미에서 네덜란드 마르코 반 바스턴 감독이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 심판이 그런 경기 운영을 하다니 실망스럽다. 특히 후반에는 거의 1분마다 주심이 반칙 휘슬을 불어 축구를 할 수 없었다”고 한 말은 귀 기울일 만하다.
증권ㆍ은행ㆍ보험 등 금융회사에 대한 감독도 예외가 아니다. 무릇 감독업무는 감독 대상이 살아 움직일 때 생기는 일거리다. 시장점유율과 순이익에서 경쟁사를 제쳐야 하는 금융회사로서는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시장활력 손상없게 운용의 묘를
때로는 반칙도 서슴지 않는 것은 경쟁이 단순히 순위를 가리는 데 그치지 않고 먹느냐 아니면 먹히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감독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감독 대상 행위를 모두 나열할 수도 없다. 고심해 만든 규정이 100% 지켜지는지 확인할 수도 없다. 더욱이 금융감독의 대상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돈’과 그 돈을 만지는 ‘사람’들이다.
결국 운용의 묘를 최대한 살리는 수밖에 없다. 프리킥감인지 아니면 레드카드를 꺼내 퇴장시킬 것인지 판단하되 시장활력의 맥을 끊어서는 안 된다. 아무려면 금융감독을 축구심판에 비길까마는 전문지식과 반복된 경험으로 응축된 고난도 기술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