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은 지난 3일 "모든 경영권을 포기하겠다"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동양시멘트 같은 주요 계열사까지 모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 회장의 진심을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재계 서열 38위, 한때 5위까지 올라갔던 동양이 대주주의 도덕적 해이 논란까지 나오면서 밑바닥까지 추락한 것이다. 해방 이후 시멘트를 중심으로 거대 기업군을 이뤘던 동양이 이 지경까지 온 이유는 뭘까.
금융계와 산업계에서 짚는 다섯 가지 이유를 알아봤다.
①주력 가라앉는데 대체사업 못 찾아
지난해 광물자원공사는 동양시멘트에 편법대출을 해줬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 감사원은 광물자원공사가 회사채를 발행해 2010년 1월 동양시멘트에 1,500억원을 빌려줬는데 동양 측은 이 돈을 빚을 갚는 데 썼다고 밝혔다. 동양그룹의 모태인 동양시멘트는 공기업에 지원을 벌려야 할 정도로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셈이다.
동양그룹은 경영환경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그룹의 캐시카우였던 동양시멘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주력사업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지만 이를 대체할 만한 것을 찾지는 못했다는 게 산업계의 분석이다. 2000년대 들어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하지 못한 게 부메랑이 된 셈이다.
발전소 건설사업에 뛰어들기는 했지만 금융권에서는 동양이 그룹 유동성 부족으로 사업을 시작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재계에서는 2세 경영자가 무리한 사업확장을 하면서 가전과 금융업에 뛰어든 것이 패착이라는 분석도 있다.
②돈 더 받으려다 계열사 매각 불발
동양이 주력 계열사들에 대한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전까지 그룹을 살릴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있었다고 금융권에서는 보고 있다. 핵심은 계열사 매각인데 지금까지 제대로 된 게 없다. 그룹 유동성 문제가 제기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도 돈 한푼 더 받기 위해 큰 일을 그르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지난달만 해도 동양파워 지분매각협상이 무산됐다. 삼척화력발전소 사업자인 동양파워는 기업가치만 1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동양이 경영권 이외의 지분만 팔려고 했다는 후문이다. 동양매직도 교원그룹에 팔려고 했다가 조건이 안 맞아 깨졌다. 5월에도 한일합섬 매각을 위해 협상을 벌였지만 막판에 결렬됐다. 동양생명은 9,000억원을 받고 보고펀드에 매각했지만 투자자 자격으로 2,000억원 이상을 재투자해 끝까지 지분 일부를 남겼다. 2011년 이후 동양증권 매각도 계속 추진했지만 번번이 가격문제로 실패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회사는 기울어져가는데 대주주가 돈을 더 받기 위해 매각을 제대로 하지 못해 실기했다"고 했다.
③제도 허점 틈타 '차입 폭탄' 돌리기
동양은 2010년부터 주채무계열에서 빠졌다. 금융감독 당국과 은행들의 간섭에서 빠져나가 경영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다. 이후 동양은 기업어음(CP)과 회사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현재 당국이 파악하고 있는 동양의 시장성 차입은 2조원이 넘는다.
당국은 이 과정에서 제대로 개입을 하지 못했다. 시장 차입을 통해 돈을 모을 경우 이를 제재하거나 감독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양 계열사들은 투기등급임에도 연 7~8%대의 고금리를 내세우며 투자자들을 모았다. 은행이나 기관투자가들은 등급이 낮아 투자를 안 했지만 개미들이 뛰어들었다. 하지만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달 "오너가가 해결하라"며 구두 개입을 했고 오리온그룹이 지원을 거부하자 동양 측의 '폭탄돌리기'는 끝내 터지고 말았다.
④경영권 지키려 우량회사마저 사지로
동양그룹은 지난달 30일 (주)동양과 동양레저ㆍ동양인터내셔널에 대한 법정관리를 신청한 데 이어 1일에는 동양시멘트와 동양네트웍스에 대한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동양시멘트와 동양네트웍스의 법정관리를 의심의 눈초리로 봤다.
동양시멘트는 그나마 계열사 중 사정이 나았고 동양네트웍스도 이관희 서남재단 이사장이 오리온 주식을 증여하기로 해 자금사정이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현 회장이 기존 관리인유지제도(DIP)를 악용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았다. 이 같은 논란에 현 회장은 경영권을 내려놓는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경영권 유지에만 혈안이 됐던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⑤망하는 순간에도 돈 빼내갈 궁리만
동양증권 노조는 이혜경 그룹 부회장이 계열사 법정관리 신청 직전 자신의 계좌에서 6억원을 인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돈의 용처에 따라 얘기가 달라질 수 있지만 과거 저축은행 사태 때처럼 도덕적 해이가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동양은 동양시멘트 지분을 담보로 지난 7월 말부터 두 달간 1,570억원 규모의 전자단기사채를 발행했다.
특히 동양이 계열사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한 달 전 찍은 CP와 회사채가 전체 물량의 약 4분의1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 업계에 따르면 동양은 9월에만 약 5,440억원 규모의 시장성 단기차입에 나섰다. 법정관리 등 최악의 상황이 올 줄 예견했으면서도 자금을 조달했다는 의혹이 나오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