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泰成(언론인)A와 B가 서로 총뿌리를 겨눈체 대치하고 있다. A를 응원하는 C가 그 밖을 에워싸고 또 총을 겨누고 있다.
A와 B는 50년도 더 넘게 이웃해 살았으니 서로 모르는 사이는 아니다. 크게 피 흘리며 싸운 적도 있었으니 결코 모르는 사이는 아니다. 그러나 한번도 속을 터놓고 얘기 해본적이 없으니 잘아는 사이는 또 아니다.
말은, 총을 겨누고 있을지언정 먼저 방아쇠를 당길 생각은 없다고 A와 B 그리고 C는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피차 믿지않는다. 특히 A를 응원하는 C가 B의 말과 행동을 의심하고 경계한다. B의 분별력을 시험하고 일깨우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대응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고 C는 보고 있다.
그러나 A에게는 이런 C의 응원이 위태롭기만하다. C의 그런 대응이 혹시라도 B를 격발케한다면 멀리 있는 C를 먼저 쏘겠는가, 가까이 있는 A를 먼저 쏘겠는가. 총을 쏘기 시작하면 승패는 그 순간부터 의미를 잃는다. B의 멸망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하지만 동시에 A에게도 피루성이의 승리만 남게된다.
그래서 A는 C의 지나침을 거꾸로 말릴 수 밖에 없는데 그러나 C는 당초 A를 응원하기 위해 끼어 든것은 사실이나 이젠 C도 당당한 당사자의 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A의 만류를 들어줄 수도 있고 안들어 줄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B의 출방이 예측가능한 것이라면 삼각으로 꼬인 이 문제는 일거에 풀어질 수 있다. 그러나 왕따를 당하고 있는 B의 출방을 예측하기는 어렵다. 어떤 돌발적인 사태도 배제할 수 없다.
거치른 비유이지만 A와 B 그리고 C의 관계가 한국 북한 그리고 미국이 놓여있는 현재의 관계와 비슷하다.
대개 사람들은 이해득실을 먼저 따져본 뒤에 득이 되는 행동을 선택한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손해가는 짓은 안한다. 위험한 짓도 피한다. 그러나 왕왕 이해득실을 따지는 피차의 계산법이 서로 다른 경우도 있다. 계산법이 다르면 거래는 성사되지 않는다. 충돌 외에는 달리 해결할 길이 없게 된다. 또 왕왕 계산을 도외시하고 너 죽고 나 죽자는 격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런 위험은 남북한관계에 늘 잠재하고 있다. 비단 남북한 관계에만 잠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경험하게 된다. 특히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각종의 노력 가운데서 그런 사례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