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순간들] <13> 제일모직 - 케미칼사업 진출

'섬유 대표주자' 만족않고 신사업 도전
日서 기술도입…진출 1년만에 첫 수출 '기염'
숱한 도전 끝에 난연수지 세계시장 50% 점유
케미칼 비중 43%로 국내대표 화학업체 우뚝


지난 1987년 1월. 국내 섬유업계의 대표주자인 제일모직에 난데없는 ‘신규사업팀’이 새로 등장했다. 당시만해도 섬유산업이 그런대로 잘 나가던 시절인지라 회사 안팎에선 이래저래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신사업팀은 곧바로 미래성장동력으로 케미칼사업 진출을 결정짓고 회사구조를 완전히 뜯어고쳤다. 같은해 11월. 삼성그룹을 세웠던 고 이병철 회장이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창업주가 삼성그룹의 모태인 제일모직에 남긴 마지막 유산이 바로 ‘끝없는 변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모직은 각고의 노력 끝에 2000년 1월, 주력 업종을 섬유에서 화학으로 변경했다. 46년간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던 ‘섬유업체’의 간판을 내리고 ‘화학업체’로 바꿔단 것이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린’ 구조조정 노력은 케미칼 사업을 주력으로, 전자재료 사업을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삼는 새로운 제일모직을 탄생시켰다. ◇케미칼에 승부수를 던지다=당시 신사업을 이끌었던 유현식 전 사장은 “모직 기업 변신의 시발점은 지난 87년 케미칼 사업부문 착수 당시라고 해야할 것”라며 “어떤 특정 한 개인이 이 같은 변신을 이끌기에는 너무 많은 난관과 리스크가 상존해 있었다”고 회상했다. 유 상무의 회상은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기존 화학부문의 시장성이 너무 낮아 섬유산업에서 애써 쌓아올린 명성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이 조심스럽게 제기되는 등 변신 초기의 어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45명의 인력으로 발족한 신규 사업팀은 면밀한 검토를 거쳐 기능성 수지와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을 핵심으로 케미칼 사업에 진출한다는 청사진을 세웠다. 우선 범용수지에서 기초 기술을 축적하고 5~20배 정도 부가가치가 높은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제품으로 옮아가겠다는 전략이었다. ABS수지는 국내에서 74년부터 상업 생산에 들어간 합성 수지의 일종으로, 81년 국내 수요는 2만2,000톤에 불과했지만 86년에는 10만톤으로 급성장하는 등 전기ㆍ전자 제품의 수출로 시장 전망이 비교적 밝을 때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도레이와 미국의 듀폰 등 기업 변신에 성공한 기업의 사례를 검토하고 과감히 벤치마킹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일단 범용수지 부문에서 ABS와 PS를 사업 아이템으로 결정했지만 기술 도입선을 찾는 게 그리 쉽지않았다. 제일모직의 한 관계자는 “갖은 노력 끝에 일본 미쓰비시레이온과 ABS 수지 기술 도입 계약을 체결하고 미쓰이비몬산토사와 12월 PS수지 기술도입 계약을 따낸 당시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공장 건설도 처음부터 숱한 난관을 겪어야 했다. 당초 울산에 7만평 규모로 공장 건설을 검토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검토한 결과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제일모직은 울산에 추가 부지 매입을 위해 공을 들였지만 용도 변경 등을 놓고 애를 태우기도 했다. ◇숱한 실패 끝에 수출길 열다=지난 88년 10월 제일모직은 PS 68톤을 홍콩에 첫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한 지 불과 1년 만에 일궈낸 쾌거였다. 이 회사는 이 같은 기회를 발판 삼아 91년 미국의 LA와 도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해외사무소를 신설하는 등 공격적인 수출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유 전 사장은“당시 화학사업에 진출하기 위해선 최소 1,000억원 이상의 투자금액이 필요했지만 단돈 180억원으로 시작했다”며 “게다가 사업 계획에는 공장 가동 1년만에 바로 이익을 내도록 설정돼 있어 전 임직원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는 일본 기술선과 체결한 제약사항으로 인해 해외시장 개척을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단지 믿는 것은 일본의 어느 경쟁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높은 품질 하나 뿐이었다. 홍콩에 첫 수출을 시작한 지 10년 만인 98년 제일모직은 이란으로부터 팩스 한 통을 받았다. 이란의 TPC사가 보낸 것으로, 제일모직이 생산하고 있는 ABS 수지 생산기술을 수입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제일모직으로선 지난 10여년간 쌓아온 노하우를 비로소 수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98년 이란 TPC사에 기술로열티 250만 달러를 받고 ABS 생산기술을 수출한 이후 수출은 날로 늘어났다. 95년부터 50억원을 투자해 상품화에 성공한 비할로겐계 난연 ABS도 99년 9월부터 전 세계시장을 상대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이 회사는 1조원대로 추산되는 세계 난연수지 시장의 점유율을 50%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후발 주자에서 선발 주자로=난연수지는 개발 4년 여만에 제일모직을 세계시장에서 GE와 BASF 등 선발 업체들을 누르고 선두 자리에 올려놓았다. 99년에 개발한 비할로겐계 난연 ABS는 처음부터 시장을 휩쓸었다. 결국 제일모직은 95년의 할로겐계 난연 수지와 99년의 비할로겐계 난연수지 시장의 50%를 점유했다. 이들 제품이 국제 시장에서 인기가 치솟자 제일모직이 생산한 다른 제품까지 덩달아 판매가 증가하기 시작하는 현상이 일기 시작했다. 기업 이미지가 곧 바로 제품 판매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케미칼 사업의 회사내 매출 비중 역시 꾸준히 상승했다. 케미칼 부문은 2001년의 경우 전체 매출의 43%를 차지해 확고한 주력 사업으로 뿌리내렸다.87년 TF팀 가동 이후 불과 14년만의 일이다. 환율하락과 고유가 현상으로 수익성이 악화된 2003년에는 난연 ABS와 압출 ABS, 투명ABS, 인조 대리석 등 고부가 제품을 잇따라 내놓으며 글로벌 히트 제품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생산성도 높아져 ABS의 경우 2000년말 19만톤에서 2004년 42만톤으로 확장해 케미칼 생산 규모(2004년 기준)는 ABS 42만톤, PS 18만톤, EPS 5만톤에 도달했다. ABS 3만톤을 생산하던 지난 89년과 비교할 때 무려 14배의 성장이라는 값진 결과를 얻어 낸 것이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