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지금 기로에 서 있습니다. 제대로 된 성장을 위해서는 세금을 걷고 쓰는 데 반드시 효율성과 형평성이 확보돼야 합니다."
명실상부 한국의 '싱크탱크'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을 새로 이끌게 된 김준경(57ㆍ사진) 원장은 23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이 예상보다 더 빨리 떨어지고 있다"며 '기로'라는 단어를 꺼냈다.
그는 "성장이 안 되면 세금이 안 걷히고 재정지출을 통해 정부 정책을 집행(implementation)할 수 없게 된다"며 "내 임기 3년간 창업ㆍ교육 등 주요 부문 재정지출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집행되고 있는지 분석해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권고하는 데 역점을 둘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그대로 이어질 경우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도 던졌다.
지난 1971년에 설립된 KDI는 '한강의 기적'을 이끌며 경제의 초석을 다졌다. 최근 KDI가 주목 받는 것도 저성장의 덫에 걸린 한국 경제에 돌파구를 마련해줄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무엇보다 전임 원장들이 한국은행 총재(김중수)와 경제부총리(현오석)에 자리하면서 KDI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도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새로 수장을 맡은 김 원장의 어깨도 어느 누구보다 무겁다. 이 때문일까. 김 원장은 인터뷰 내내 발언에 신중했다. 아직 정립이 되지 않았거나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하지만 필요한 부분은 누구보다 명쾌한 어조로 해석을 가했다. 하얀 종이 위에 10장 넘게 직접 펜으로 우리 경제의 문제점을 써내려가면서 해결방향을 적시했다. KDI의 제언은 곧 정책과 연결될 수 있다는 책임감이 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그는 "한국은 이미 1960~1980년대 도약 과정에서 쌓아온 많은 성공사례를 갖고 있다"며 "KDI가 과거 경험을 토대로 미래를 개척하는 방향을 연구하는 것은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성장-세수-재정지출 선순환 구조 복원해야"
김 원장은 한국 경제가 저성장 기조로 고착화하는 데 대해 크게 우려했다.
"어떻게 해서든 성장하기 위해서는 모든 계층이 노력한 만큼 성과에 따라 혜택을 누리는 '포용적 경제성장(inclusive growth)'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양극화가 더 심화되면 계층 간 갈등으로 정부가 좋은 정책을 쓸 수가 없어요."
이런 흐름에서 그가 비교한 곳은 바로 장기불황에 빠진 일본이다. 한국은 일본보다 고령화 속도가 빠르고 양극화가 심하다는 점에서 더 걱정된다고 했다.
"(일본 같은 장기불황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세금을 걷어 지출하는 데 효율성과 형평성을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률이 높아지면서 세금이 다시 걷히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고 일본과 다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성장이 워낙 미흡하다 보니 당장 걱정은 세수다. 김 원장은 "왜 잘 안 걷히는가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과제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1960년대 중반까지는 세입기반이 취약했는데 1966년 국세청 창설을 계기로 세정개혁을 추진하면서 1966~1970년까지 5년간 5,000개 이상 기업에 대한 세무조사가 단행됐다"고 소개했다.
"1965년부터 성장률이 오르면서 기업이 세금을 납부할 여력이 생긴 영향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세금이 매년 51%씩 늘었고 1974년에는 미국의 원조를 받지 않는 자립정부가 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가 빈곤의 악순환에서 경제발전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터닝포인트였습니다."
"집행이 문제"…창업ㆍ교육 등 재정지출 분석해 국가 방향 권고할 것
더 중요한 것은 정책집행이다. 김 원장은 인터뷰 내내 "집행이 문제(implementation matters)"라는 말을 반복했다. 정책을 도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책이 제대로 집행되는가가 매우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사실 지금까지 정책집행이 제대로 되느냐에 대해 경제학자들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정책이 수립되면 당연히 추진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린이집에 재정지원을 해주지만 파행으로 치닫고 이른바 '잠자는 교실'로 치부되는 공교육 문제는 해결될 기미조차 없다.
김 원장은 "KDI 연구진 60명이 모든 정책집행을 다 볼 수는 없는 만큼 창업ㆍ교육부터 들여다 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예를 든 것은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이다.
그는 "본래 신보와 기보는 업력이 짧은 기업을 지원해야 하는데 실제 혜택을 받은 상당수 기업은 10년, 15년 업력이 된 곳들이다. 이는 집행이 잘못된 사례"라고 지적했다. 김 원장은 "KDI 같은 연구기관이 문제를 제기하고 정책자금이 잘못 전달되는 것을 과학적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일반 국민들도 납득할 수 있도록 하면 문제점을 시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책집행을 피드백하고 모니터링하는 것이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는 "결국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좌우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접근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방향으로 KDI 연구진에 동기부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국가가 이렇게 효율적으로 국민세금을 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징세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경제의 역동성이 올라가면 정부는 자신감이 생기고 국민들은 안심할 것입니다."
"미 양적완화…부채감축 아직 부족하다고 본다"
경제 현안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 원장은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답변을 피하면서도 글로벌 경제를 꼼꼼히 진단해 내려갔다
"최종소비자인 미국과 유럽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국제무역이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벌써 5년이 지났는데 생산자인 중국이 7%대 성장을 말하고 우리도 수출이 한자릿수라는 것은 여진이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KDI 분석에 따르면 미국 출구전략의 '좋은 시나리오'는 단기적으로 금융시장이 영향을 받더라도 실물 부문에서 달러 강세에 힘입어 수출이 느는 것이다. 반대로 '나쁜 시나리오'는 금융시장 변동성이 급격히 커지고 원화가 2009년처럼 가파르게 절하해 신용경색이 나타나면서 원화약세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안 늘어 실물 부문까지 침체하는 것이다.
그는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 의장이 2015년 금리인상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실물경제 회복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어서일 것"이라면서도 "다만 양적완화가 부채감축을 지연시키면서 구조조정이 상대적으로 미흡해진 것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부동산에 대해서는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정치적ㆍ사회적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외환위기 이후 담보력이 더 많은 부자들이 주택을 많이 가져가면서 부동산 지니계수가 사상 최악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주택담보대출이 활성화됐을지는 몰라도 분배는 악화됐다"며 "부동산 세제에 대해서는 심층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비스업 개방하고 중소기업 경쟁력 높여야"
다시 낮은 경제성장률로 화제가 전환됐다. 우리나라는 다시 성장률을 높일 수 있을까. 원론적인 질문이지만 김 원장의 답변에는 힘이 실렸다.
"삼성전자는 다국적 기업이 됐지만 서비스업같이 폐쇄돼온 분야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개방을 했지만 실제로는 규제가 많은, 이를테면 경제특구의 원스톱 서비스가 잘 안 되는 것은 충분히 개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외국인 근로자도 좀 더 양질의 이민정책을 전향적으로 검토해서 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중소기업 정책도 보호ㆍ육성만 할 게 아니라 비효율적인 기업을 유망섹터로 재배치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 것 같고…"
김 원장의 발언에는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특히 중소기업 역량 강화 방안에 대해 그는 새마을 운동을 예로 들었다.
"새마을운동 당시 마을 3만5,000개를 성적에 따라 자립(발전)-자조-기초(낙후)마을로 나뉘었는데 1972년만 해도 50% 이상을 차지하던 기초마을이 4년 만에 사라졌습니다. 전부 자립마을이 됐죠. 비결은 간단합니다. 뒤처진 마을 지도자를 우수마을 지도자와 함께 교육하고 우수마을을 직접 방문해 경험을 전수 받도록 한 결과였습니다. 중소기업 역시 뒤처진 기업이 역량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승자를 따라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김 원장은 우리나라는 성공의 DNA를 이미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가 2년반 동안 연구한 한국의 발전경험 사례연구에서 이미 확인했다고 했다.
"1960~1980년대 도약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성공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포용적 성장과 같은 개념은) 결코 새로운 접근이 아닙니다."
He is… ▲1953년 서울 ▲1975년 경기고 ▲1980년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1988년 UC샌디에이고 경제학 석ㆍ박사 ▲1990년 KDI 연구위원 입사 ▲1996년 컬럼비아대 초빙교수 ▲1998~2000년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1999~2000년 KDI 거시경제팀장 ▲2000~2002년 하와이대 초빙교수 ▲2002~2006년 KDI 연구조정실장, 금융경제팀장, 거시금융경제연구부장 ▲2005~2006년 국민경제자문회의 정책기획위원회 전문위원 ▲2006~2007년 KDI 부원장 ▲2008년 17대 대통령인수위원회 위원 ▲2008년 대통령실 경제수석실 재정경제2비서관 ▲2011년 국무조정실 금융감독혁신TF 민간위원장 ▲2008~2013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2013~ KDI 원장 |
■ 김 원장은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얼리버드형 인간'이다. 일선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가 새벽4시에 출근하는 바람에 아침마다 문을 열어주는 KDI 경비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원장 취임 후 출근시간은 8시로 늦춰졌지만 그는 여전히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김 원장은 연구 완성도를 중요시해 완벽을 추구할 만큼 엄격하기로 알려져 있다. KDI를 거쳐간 역대 원장 중 연구라는 기본목표에 가장 매진할 인물로 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정책대안 없이 '연구를 위한 연구'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정책연구기관이 만든 보고서는 항상 정책을 제안해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KDI 연구진이 김 원장을 대할 때 학문적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 원장의 전공은 금융이다. 특히 부실은행 처리, 기업 구조조정, 금융산업 분리, 금융감독체제 등에 대한 연구 경험을 많이 갖고 있다. 원장 취임 전에는 KDI국제정책대학원에서 새마을운동 등 한국경제사를 연구했다. 그의 아버지가 박정희 대통령의 최장수 비서실장이던 김정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새마을운동 연구는 더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MR. 새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원장이 취임하자 KDI는 한껏 고무된 분위기다. 1990년 KDI에 입사한 후 23년간 몸담은 만큼 누구보다 조직을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실제 연구를 많이 경험해본 원장이라 누구보다 학자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한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KDI에 록밴드를 만드는 등 연구원들과 인간적으로 소통해본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도 새로운 수장을 맞이하는 조직에는 반가운 부분이다. 그는 취임사에서도 "제가 깊은 애정을 가지고 젊음을 바친 직장의 리더가 돼 감개무량하다"며 "23년간 저를 키워준 KDI에 대한 소명을 다하겠다"고 했다. 특히 올해 말 예정된 세종시 이전으로 구성원들의 불안감이 높은 KDI를 다독이며 이끌 수 있는 인물로는 그만큼 적합한 인물이 없다는 게 KDI 안팎의 평가다. 취임 후 김 원장은 세종시에 건축 중인 건물을 방문해 안전모를 직접 쓰고 한 시간 동안 건물 구석구석을 살폈다. KDI의 한 관계자는 "KDI가 세종시에서 '대한민국 연구기관의 랜드마크'로 자리잡기 위해 만전을 기하고 있다"며 "특히 연구원과 대학원의 도서관을 통합하는 작업에 매우 관심이 높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