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8월24일]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

겹경사를 맞은 프랑스의 하늘에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왔다. 1572년 8월24일 파리. 시내가 흥에 넘쳤다. 위그노(신교도)인 나바르공국의 왕자와 가톨릭 신자인 공주의 결혼식 축제 엿새째. 성 바르톨로메오(바돌로매) 축일까지 겹쳤다. 신구교도가 어울려 먹고 마시며 춤추던 분위기 속에 일단의 무리가 칼을 들었다. 파티는 살육장으로 변했다. 일주일간 이어진 학살로 위그노 4,000여명이 죽었다. 센강이 피로 넘쳤다. 학살 배후는 섭정 카트린 드 메디치 모후. 피렌체의 거상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조카이자 앙리 2세의 미망인이다. 결혼식을 전후해 아들(샤를 9세)이 위그노 세력과 가까워지자 선택한 게 위그노 지도세력 척살령. 한번 맛본 이교도의 피에 흥분한 종교적 광기는 전국으로 번졌다. 국왕의 중지 명령에도 10월까지 테러가 이어지며 7만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학살 소식을 접한 로마에서는 난리가 났다. 신의 은총을 경배하는 축포가 터지고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학살을 기리는 성화(聖畵)와 메달까지 만들었다. 기쁨은 잠시, 가톨릭과 프랑스는 두고두고 후유증에 시달렸다. 프랑스를 빠져나간 위그노 30만여명이 영국과 네덜란드ㆍ독일 등 신교국가들의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위그노의 대탈출은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령(1492년)과 함께 서양 경제사의 흐름을 바꾼 고급 인력 이동 사례로 꼽힌다. 프랑스가 식민지 경쟁에서 영국에 밀린 요인을 위그노 인력의 상실로 보는 시각도 있다. 축제의 가면 속에 자행된 학살로부터 434년이 지난 오늘날, 압제와 억울한 죽음을 보고 박수치는 광기는 과연 사라졌을까. 정치적 이유, 실망감으로 둥지를 떠나는 고급 인력은 더 이상 없을까.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