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스위스 헌정체제에서 배워야

안성호 대전대 교수 개헌추진국민연대 공동대표


수년 전 한국을 방문한 국제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한국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최악의 지정학적 환경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강대국의 흥망'을 저술한 역사학자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는 2010년 8월27일자 뉴욕타임스(NYT) 칼럼에서 한국은 그동안 북한의 위협과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지정학적 국방안보의 취약성 때문에 결국 "동아시아의 스위스가 될 수 없을 것"으로 비관했다.

'고슴도치국방' 비결은 분권 경쟁력

과연 한국은 지정학적 국방안보의 취약성 때문에 동아시아의 스위스로 번영할 수 없는가. 그러나 스위스 2차대전사는 이런 비관적 전망이 한국의 숙명이 아님을 보여준다. 강대국 프랑스까지 가공할 나치 군대에 무릎을 꿇는 상황에서도 스위스 연방정부와 군 지도부는 국민에게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향후 전단이나 라디오로 스위스가 항복했다는 정보를 접할 경우 적의 농간임을 주지시켰다. 이어 스위스국민은 알프스 산록의 2만2,000개 지하벙커에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결사항전의 전의를 불살랐고 전시 식량자급을 위해 공원과 개인정원까지 갈아 곡식 씨앗을 심었다. 이런 비상한 항전태세는 히틀러로 하여금 스위스 침공을 단념하게 만들었다.

역사학자 스티븐 할브룩은 2차대전 당시 스위스의 '고슴도치국방' 비결은 스위스의 지방분권적 연방제와 직접민주제, 그리고 그 연장인 시민군에 있다고 지적했다. 공포에 질린 스위스 주변국 엘리트들은 개전 직후나 심지어 개전하기도 전 나치 군대에 항복하고 국민에게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그러나 국가 중대사의 결정권과 군사력이 시민의 손에 있던 스위스에서는 엘리트들이 원한다고 임의로 항복할 수 없었다.

히틀러 침공을 막은 스위스 국민의 결사항전 의지는 민족·언어·종교가 아니라 분권참여의 헌정체제에서 형성된 정체에 대한 뜨거운 애정, 곧 '헌정애국심'에서 비롯됐다. 스위스 국민은 일 년에 네댓 차례 소득세와 법인세 등의 과세권을 포함한 주요 지방사안과 국사 20~30건을 직접 결정하면서 애향심과 애국심을 키운다.

일찍이 알렉시스 토크빌은 1831년 뉴잉글랜드 지역을 방문해 2,000~3,000명 규모의 타운미팅 민주주의를 목격하고 신생 미국이 머지않아 세계를 이끌 강대국으로 번영할 것임을 예견했다. 토크빌은 뉴잉글랜드 주민의 남다른 향토애와 능동적 시민정신이 타운미팅에서 "독립국가"에 준하는 막강한 자치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헌정체제의 주인의식임을 확인했다.

지정학적 안보 취약… 개헌 통해 극복을

최악의 지정학적 국방안보 약점을 지닌 한국이 2차대전 스위스의 고슴도치국방에서 배워야 할 귀중한 교훈은 국민통합과 정치신뢰를 저해하는 초집권적 소용돌이 '87년 헌정체제'를 헌정애국심과 자유정신을 함양하는 분권참여 헌정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로 분권참여 개헌은 선진국 문턱에서 "국가 대개조"가 요구되는 위기적 상황에 직면한 한국이 지정학적 국방안보의 취약성을 극복하고 고도의 국민통합과 지속적인 경제번영을 이룩하면서 동아시아 평화를 선도하는 선진통일 한국으로 도약할 권력공유민주주의 헌정체제의 기초를 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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