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울 것 하나 없던 어린시절
영화·책읽기·글쓰기에 몰입
결핍·열등감이 지금의 나 키워
여성에 대한 선입견 깨려다
화려한 이력 더 주목 받은 듯
'라이프 오브 파이' 같이
주제의식·기술력 함께 갖춘 새로운 영화 만들고 싶어
심재명(52·사진) 명필름 공동대표는 한국 영화계를 말할 때면 언제나 일 순위로 호명되는 이름이다. '접속' '해피엔드' '공동경비구역 JSA'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마당을 나온 암탉' '건축학개론' 등 한국 영화사에 발자국을 남긴 많은 영화가 그의 손에서, 그가 대표로 있는 명필름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심 대표가 영화계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이유는 단순히 흥행 작품들을 내놓은 제작사의 대표라서만은 아니다. 그는 '잘까, 말까, 끌까… 할까?'라는 영화 '결혼이야기'의 문구를 써 단박에 주목을 받은 뛰어난 카피라이터였고 지난 1992년 국내 최초로 영화 마케팅사를 세운 불세출의 마케터였으며 한국 사회의 단단한 유리 천장을 뚫어낸 1세대 여성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이런 명사를 만나 인터뷰를 하는 것은 기자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버겁다. 그의 이야기는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수십 차례 조명됐고, 재조명됐다. 대체 그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좀 더 할 수 있을까. 심지어 4월 심재명 한 사람에 대한 기록만으로 145쪽을 온전히 채운 책(바이오그래피 매거진 3호·스리체어스 펴냄)마저 나온 마당에 말이다. 완벽해질 수 없다면 차라리 마음을 비우는 편이 낫다. 영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심재명이라는 성공한 여성에 대해 궁금했던 한 사람의 여자로서 그동안 궁금한 것들을 두서없이 묻기로 했다. 그리고 마음에 남은 말들을 추려 모았다.
◇"결핍과 콤플렉스, 나를 있게 한 어떤 것들"=『난 범죄를 저지르는 수준까지는 아니었고 그저 청개구리 기질에, 공부는 멀리하고 영화 보기에 빠져 아버지 주머니를 몰래 털어 극장이나 들락거리는, 친한 친구 한 명 제대로 없이 공상과 상상에 빠져 흐물거리는 낙지처럼 꿈틀대는 십 대였을 뿐.』(엄마 에필로그 中·심재명 저)
시대를 읽고 영화를 기획하는 데는 동물적인 감각이 있다고까지 평가받는 영화인. 그 감각은 어디에서 어떻게 자라난 것일까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유년·청년 시절을 돌이켜 "지나치게 열등감이 많았던, 어둡고 우울한 소녀"였다고 기억했다.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었고 재능이 뛰어나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가난했어요. 나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것들이 너무 부족하게만 느껴졌고 그 결핍의 감정들이 열등감을 불러왔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우울해질 필요는 없었던 것 같은데 왜 그랬나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으로 결핍을 채워갔다고 한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기에 처음에는 미술을, 화가 모딜리아니의 생애를 그린 프랑스 영화 '몽파르나스의 등불'을 접한 후부터는 영화도 함께 사랑했다. 책 읽기와 글쓰기 또한 그가 빠져든 일들이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30세가 되기까지 매일 일기를 썼어요. 영화를 보는 날이면 일기가 감상문이 됐죠. 그렇게 누가 시켜서 한 일들이 아니라 제가 좋아서 한 일, 취미로 하면서 익혔던 감각들이 지금 영화 일을 하는 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결국 결핍과 열등감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어떤 것들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들죠."
◇영화인 혹은 여성 영화인=영화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영화인이 되겠다는 구체적인 꿈을 꾼 것은 아니라고 했다. "감히 영화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아무나 못하던 시기였으니깐 그저 짝사랑하듯 영화를 좋아했던 것 같다"는 심 대표는 1987년 서울극장 기획실에 입사하며 영화 일을 시작했다. 그는 "일을 시작하면서도 영화 현장으로 간다는 들뜸보다는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월급도 꼬박꼬박 나오니 참 좋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처음의 이 소박한 생각(?)과 달리 그의 이력은 점점 화려해진다. 카피라이터와 마케터로 이름을 날리던 심 대표는 1995년 자신의 이름 한 글자를 딴 영화제작사 명필름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20년. 4월 개봉한 '화장(임권택 감독)'까지 그의 손을 거친 영화만 36편이다. 가장 마음이 쓰이는 영화가 있을까.
"영화는 자식 같아서 자랑스러운 자식도 있고, 안쓰러운 자식도 있고 그런 것 같아요. 영화마다 각각의 기억과 생각이 있는 거죠. 하지만 굳이 꼽자면 2011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오성윤 감독)'이랄까요. 가장 제작기간이 길었던 작품인데다 처음 해본 애니메이션이라 시행착오도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결과를 거뒀어요. 자랑스러운 자식인 셈이죠."
그의 성공은 '여성'이라는 상징성 덕분에 조금 더 빛난 측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명필름의 공동대표는 이은과 심재명 두 사람인데 제가 여성이다 보니 언론에 더 주목을 받고 앞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여성이라는 점을 많이 인식했어요. 이를테면 '여자니깐 안돼'라는 선입견을 깨려고 스스로 더 노력함으로써 오히려 더 좋은 평가를 받게 된 부분이 있겠죠."
하지만 여성은 영화계에서, 또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소수자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심 대표는 "영화사를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다른 여성 대표들과 비교해 저는 남편인 이은 대표가 있었으니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죠. 그럼에도 한국 영화계의 여성 감독 수는 아직 적고 활동 분야도 마케팅 쪽에만 집중돼 있어요. 여전히 소수자의 지위에 있기에 여성영화인들 간의 연대나 이런 것들이 참 소중하죠"
◇주제의식에 첨단기술 융합하고파=심 대표는 명필름 20년을 돌이켜 보면 4단계로 구분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설립부터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 등의 영화를 내놓으며 명필름의 이름을 충무로에 알렸던 시기가 1기, 더 큰 영화를 꿈꾸며 강제규필름과 합병해 엠케이픽처스를 만들었던 때가 2기, 3년 만에 분리한 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건축학 개론' 등의 영화로 재도약의 틀을 다진 시기가 3기, 그리고 5월 경기 파주에 명필름아트센터·영화학교를 오픈하며 파주 시대를 연 지금이 4기다.
영화학교와 공연 사업 등 새로이 시작하는 일도 있지만 우선 본업인 영화 제작에서 포부를 물었다. 심 대표는 "지금까지 나는 기술적인 새로운 시도보다는 현실의 드라마,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데 관심을 쏟은 것 같다"며 "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 같은 영화를 보며 기술적으로 뛰어나면서도 빼어난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영화가 목표가 됐다"고 했다. 기술과 드라마의 완벽한 조합을 그리며 최근 3D 장편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 작업에 돌입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특히 명필름 4기의 핵심사업은 인재 육성이다. 영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심 대표는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균형감각을 잘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꿈만 꾸면서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영악하고 현실적이라 큰 그림과 이상을 놓치고는 하잖아요. 그 두 가지를 조화롭게 가지고 가는 것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가장 현명한 태도가 아닌가 싶어요"
She is… △1963년 서울 △1987년 동덕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극장(합동영화사) 입사 △1989년 극동스크린 기획실장 △1992년 프리랜서 영화마케터로 '결혼이야기' 홍보, 명기획 설립 △1995년 명필름 설립 △1996년 창립 작품으로 '코르셋' 기획·제작 △1997년 '접속' 제작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 제작, 제23회 황금촬영상 제작공로상, 제3회 디렉터스컷 올해의 제작자상 △2001년 '와이키키 브라더스' 제작, 제24회 황금촬영상 제작공로상 △2004년 강제규필름과 합병, MK픽처스 설립 △2007년 MK픽처스에서 명필름 분리 △2008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제작 △2010년 '작은 연못' 제작·투자, '시라노:연애조작단' 제작 △2011년 '마당을 나온 암탉' 제작 및 제작투자, 올해의 여성문화인상, 제3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상 △2012년 '건축학개론' 제작, 명필름문화재단 설립, 제3회 올해의 영화상 영화인상, 제3회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 △2015년 '화장' 제작, 제6회 올해의 영화상 영화인상, 명필름영화학교 개교 |
"20년 역사상 최대 도전… 영화 만들고 배우고 누리는 공간 됐으면" 파주에 영화학교 아트센터 문 연 명필름 "지금이 명필름 20년 역사상 가장 큰 변화와 도전에 직면한 시기인 것 같아요." 심재명 대표는 지난 1일 경기 파주에서 명필름아트센터·영화학교(사진)의 문을 열고 이른바 '명필름 파주시대'를 열게 된 소감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그럴 것이 이제 명필름은 지금까지 주력해온 영화 제작뿐 아니라 영화관·전시·공연 사업 등도 함께할 계획이다. 건축가 승효상이 '도심 속에 작은 영화도시'라는 콘셉트로 설계했다는 명필름아트센터·영화학교는 지하 2층~지상 4층, 연면적 7,041㎡ 규모로 조성됐다. 지하 1층에는 디지털 4K 영사시스템과 돌비 애트모스 3D 사운드를 자랑하는 영화관이, 지상 1층에는 영화·건축·디자인을 테마로 하는 북카페 '카페 모음'이 자리 잡았다. 지상2~3층에는 블랙박스 형태로 설계된 250석 규모의 다목적 공연장이 위치했으며 지상 4층에는 현대미술·음악·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재능 있는 아티스트들이 작업을 선보일 수 있는 전시공간이 마련됐다. 핵심 사업은 영화학교를 통한 인재 육성이다. 10명의 학생을 소수 정예로 뽑아 총 2년간의 제작 과정을 전액 무료로 지원한다. 영화에 대한 기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인재들을 영화판에 적응시키고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영화학교는 이은 대표의 주도하에 이뤄진 일이에요. 명필름의 20년 성과와 노하우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죠. 명필름의 지금까지 성공들이 함께한 영화인들의 덕분인 만큼, 그런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 영화인들과, 영화를 절실히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전달하는 것이 영화계에 기여하는 길인 것 같다는 소명의식 같은 것도 있었어요" 끝으로 이 공간을 어떻게 꾸려가고 싶은지에 대해 물었다. "영화를 만들고 배우고 누리는 공간이 됐으면 해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배우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2016년이면 이 도시에 영화제작사뿐 아니라 영상업체, 후반작업회사 등이 차례로 문을 열 거예요. 모두가 함께 소중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도시가 되기를 꿈꿔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