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금융시장에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이 과정이 마치 10년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와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돼 주목된다. 자본시장의 문호를 개방한 아시아 신흥국들의 경우 초기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오고, 이것이 경제성장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외부 충격이 가해지자 오히려 유입된 외국자본이 부메랑이 돼 신흥국의 외환 및 금융시장을 마비시키는 독으로 작용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외국자본의 홍수 속에 고도 성장을 구가하다가 1997년 7월 태국의 바트화 폭락을 계기로 갑자기 외국자본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면서 외환위기를 겪게 됐다. 당시 외환위기를 맞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우리와 비슷했다. 이들 아시아 국가들은 90년대 초 미국과 국제기구들의 금융시장 개방 압력과 권유로 주식, 채권 등 각종 금융거래가 자유화됐고 외국인의 직접투자는 물론 외국 금융자본의 진출입에 대한 규제도 대폭 완화됐다. 동유럽 국가들의 위기 이면에도 역시 시장 개방이라는 과정이 있었다. 현재 금융위기의 소용돌이 속에 놓인 동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2004년이후 유럽연합(EU)에 가입해 서구 자본주의체제로 편입됐다. 지난 2004년 5월 1일 헝가리,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와 발틱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이 EU에 가입했으며,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뒤를 따랐다. 이들 국가의 금융 및 자본 시장, 직접투자시장(FDI)이 개방되자 외국 자본, 특히 서유럽 은행들의 자본이 물밀듯이 유입됐다. 이후 동유럽 국가들은 개방이전 보다 두배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한 때 EU의 '새로운 성장동력'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들 국가는 하지만 처음부터 대외의존형 경제 구조라 외부 충격에 취약한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자본주의 경험이 일천한데다 중앙은행 등 자체 금융시장 시스템이 미비한 동유럽 국가들은 지난해 9월이후 전세계를 휩쓴 미국발 금융위기 당시 1차 타격을 받은 서유럽 국가들의 자금 회수에 속수무책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 국가는 급격한 성장 둔화 및 금융위기의 가능성에 노출됐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고 통화가치 폭락에 따른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됐다. 이미 라트비아, 헝가리, 우크라이나가 벌써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일정액의 구제금융을 받은 상태이고, 불가리아,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폴란드, 체코 등이 러시아와 함께 국가 부채가 위험수위에 달하면서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이 커졌다. 동유럽의 문제는 현재 글로벌 금융시장의 '태풍의 눈'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들 국가의 경제 붕괴는 공격적으로 투자해온 선진국 금융기관들의 부실로 이어지기 마련. 지난주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동유럽 국가들의 신용등급을 낮출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이들 지역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한 서유럽 은행들의 금융회사의 신용등급마저 영향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18일 동유럽 은행의 총 부채규모는 1조5,000억 달러 이상이며, 이 가운데 서유럽 은행이 차지하는 비중은 94.7%(8,883억달러)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미국, 일본 등 타지역 은행들의 대출 비중이 각각 10.3%, 4.8%에 비하면 수십배에 달하는 규모이다. 이들 은행들의 대출은 거의 지난 5년간 집중됐으며, 당시 오스트리아의 라이프아젠 첸트랄방크, 프랑스의 소시에테 제네랄, 스웨덴의 스웨드방크 등 서유럽 금융회사들은 동유럽 은행들을 포섭해 자회사 형태로 운영해 왔다. 이중 특히 오스트리아는 그간 '동유럽의 금고' 역할을 자임해 왔으나 앞으로 동유럽 국가들이 실제 디폴트에 빠질 경우 가장 먼저 직접 타격을 입을 '제 1의 위험국가'로 거론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상업은행 라이프아젠 첸트랄방크의 경우 동유럽 대출 비중이 무려 80%(위험가중치자산기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가 그랬듯이 이제 동유럽발 금융위기로 인해 서유럽의 선진국 시장을 거쳐 아시아 신흥시장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동유럽에서 큰 손실을 입은 서유럽 은행들이 자금부족 상태에 빠지면 한국 등 아시아시장에서 자금을 빼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동유럽의 위기가 신흥 시장 전체의 위기로 인식돼 한국의 국가신용을 급격히 떨어뜨리고 있다. 한국의 국가 신용부도스왑(CDS) 프리미엄은 지난주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수년래 최고치인 4%대를 초과해 금융불안의 단초가 되고 있다. FT에 따르면 모건스탠리의 투자분석가 마이클 왕은 "현재 동유럽 국가들이 직면한 문제는 신흥시장에서 벌어지는 전형적인 모습과 닮아 있다"며 "경제 호황기에 외화 차입에 지나치게 의존하다가 경기 침체가 닥치면서 자금이 빠져나가자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