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龍萬(LG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정부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잘 구별해야 한다. 이를 잘 구별하면 정부는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공정한 중재자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시장을 교란시키는 난폭한 폭군이 될 수 있다.
새로운 자금조달 방법으로 작년에 도입된 자산유동화제도는 이러한 정부의 역할 설정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자산유동화제도는 자산을 담보로 채권(자산담보부채권:ABS)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담보자산을 자산보유자의 파산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산매각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자산보유자는 자산유동화를 위해 설립된 특수목적회사(SPV)에 자산을 양도한 후, 특수목적회사가 양도받은 자산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는 형식으로 자금을 조달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특징 때문에 자산유동화제도는 부채비율을 높이지 않으면서도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제도로 인식되고 있다.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부채비율을 축소해야 하는 기업들로서는 귀가 번쩍 뜨이는 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정부의 역할설정 잘못으로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이 제도가 갖고 있는 문제점으로 불필요한 정부규제를 들 수 있다. 현재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은 금융기관(신탁회사 포함)과 일부 공기업, 그리고 「국제적 신인도를 가진 기업」으로 한정되어 있다. 국제적 신인도가 없는 기업에게까지 이 제도를 허용하면 사기꾼같은 기업이 이를 이용하여 사기를 칠 수 있다는 것이 정부규제의 변이다. 이 제도가 어느 정도 정착되면 규제를 점진적으로 풀겠다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이고 있다.
정부의 이러한 노파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기꾼인지 아닌지는 시장이 판단할 문제이지 정부가 미리 예단하여 시장참여를 제한할 문제는 아니다.
더군다나 담보자산이 자산보유자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에 자산보유자의 신인도는 ABS발행에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우량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부실한 기업」이 자산유동화제도를 가장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보자.
만일 한보가 정부로부터 받을 외상채권을 갖고 있다면, 한보는 자신의 신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없기 때문에 외상채권을 담보로 ABS를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한보는 「국제적 신인도를 가진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자산유동화제도를 이용할 수 없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정부는 일반 기업들도 신탁회사를 통해 자산유동화제도의 잇점을 누릴 수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신인도가 낮은 기업은 자산을 신탁회사에 신탁하고, 신탁 회사는 신탁받은 자산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거래에는 비용이 수반된다. 자산을 신탁회사에 신탁하게 되면 신탁수수료를 내야 한다. 신탁자산이 부동산이라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지나친 거래비용으로 아예 자산유동화제도를 이용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자산유동제도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산유동화법에는 유동화시킬 수 있는 자산의 종류를 채권과 부동산, 그리고 기타 재산권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기타 재산권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유동화시킬 수 있는 자산의 종류가 결정되고, 이로 인해 유동화시킬 수 없는 자산이 생길 수 있다. 물론 시행령을 통해 유동화시킬 수 있는 자산의 종류를 확대하면 된다. 그러나 상상도 못할 자산을 들이대면서 이를 유동화시키겠다고 할 때 정부가 이를 순순히 받아들여 시행령을 고쳐줄 지는 의문이다.
자산유동화제도를 통해 유동화시킬 수 있는 자산의 영역이 얼마나 넓은지 예를 들어보자. 지난 97년에 스페인의 명문 축구팀인 리얄 마드리드는 자신이 운영하는 축구구장의 운영수익을 담보로 5천만달러에 달하는 ABS를 발행하였다. 같은 해 유명한 팝가수인 데이빗 보위는 자신의 앨범 25장의 수익을 담보로 5천5백만달러의 ABS를 발행하였다.
영화제작사인 드림 웍스사는 만들지도 않은 영화를 담보로 3억불의 ABS를 발행한 적도 있다. 아마 우리나라 정부라면 왠 사기꾼같은 짓이냐며 ABS발행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찬호나 박세리 같은 선수도 자신이 앞으로 벌어들일 소득을 담보로 ABS를 발행하겠다고 나설 법 한데 과연 정부는 앞으로 벌어들일 소득까지 재산권으로 인정해줄 것인지 의문이다.
이처럼 정부는 자신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 자산유동화제도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당장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자산유동화제도의 하부구조, 그 중에서도 특히 자산평가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구축하는 것이다.
ABS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담보자산의 가치를 평가해야 하는데, 현재 우리나라에는 가치평가에 필요한 자료가 거의 축적되어 있지 않다. 일단 자료축적이 되면 담보자산의 가치평가 비용이 저렴해지기 때문에 모두들 쉽게 자산유동화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자료축적이 안된 초기에는 평가비용이 너무 커 모두들 자산유동화제도를 기피하게 되고, 자산유동화제도를 기피하면 기피할수록 자료축적은 안된 자산유동화제도의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다. 정부가 할 일은 바로 여기에 있다. 초기의 자료축적 비용을 부담해 줌으로써 자산유동화제도를 본궤도에 올려놓으면 시장은 자동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이다.
정부가 제대로 역할을 설정하는 것, 힘들면서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