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0년대 후반 자본과 기술은 물론 자원마저 없는 우리나라에 제철소를 건설한다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꿈 같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을 비롯한 포철맨들은 온갖 어려움을 딛고 영일만에 종합제철소를 성공적으로 세웠다. 이어 광양만에도 최신이자 최대 규모의 제철소를 지었다. 우리나라가 철강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영일만과 광양만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포스코가 현재와 같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와 국민들의 성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박태준'이라는 걸출한 리더의 강력한 리더십이 보태지지 않았으면 불가능했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1978년 중국의 최고실력자 덩샤오핑이 일본의 기미쓰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는 대답을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된 박 명예회장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탁월한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 받아 종합제철소 건설의 특명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박 명예회장은 제철소 건설과정에서 고비고비마다 특유의 결단력과 열정으로 난관을 극복하며 세계가 부러워하는 철강신화를 일궈냈다. 제철소 건설과정의 수많은 에피소드는 박 명예회장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1967년 일관제철소 건설 지원을 위해 조직된 국제차관단이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부정적인 전망으로 와해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박 명예회장은 일본의 유력인사들을 일일이 설득,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도록 해 좌절될 뻔했던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을 실현한다. 이와 함께 포스코의 DNA와도 같은 '제철보국'과 '우향우 정신'은 박 명예회장이 건설 초기 철강역군을 하나로 만드는 공동의 좌우명이 됐다. 이 땅에 일관제철소를 건설, 경쟁력 있는 산업의 쌀을 안정적으로 공급해 조국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제철보국은 포스코의 존립 근거이기도 하다. 우향우 정신은 선조의 핏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는 일관제철소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며 성공하지 못할 경우 제철소 건설부지에서 우향우해 영일만에 몸을 던지자는 단호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박 명예회장은 공기업 체제에 따르는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특히 중점을 뒀다. 이러한 책임의식은 완벽주의로 연결됐다. 1977년 3기의 발전송풍 설비 구조물 공사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공사가 80% 정도 진행된 상태에서 모두 폭파했다. 부실공사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박 명예회장의 완벽주의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목욕론도 박 명예회장의 일면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깨끗한 몸을 유지하는 사람은 정리ㆍ정돈ㆍ청소의 습성이 생겨 안전ㆍ예방의식이 높아지고 최고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며 청결한 주변관리를 주문했다. 이 때문에 제철소 건설 초기부터 현장에 샤워시설을 완비했다. 아울러 1983년 광양제철소 호안공사 시공 때는 감사팀 직원들에게 스쿠버 장비를 갖춰 바닷속에서 13.6㎞ 호안의 돌을 일일이 확인하게 하며 불량시공을 점검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철저한 비리근절도 박 명예회장이 한결같이 지향했던 경영철학이다. 각종 납품비리와 청탁압력이 극에 달했던 1970년 박 명예회장은 정치권의 압력 배제와 설비공급 업자 선정의 재량권 부여 등을 골자로 한 메모를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소위 '종이마패'로 불린 이 메모는 외부압력을 차단하고 비리를 근절하는 상징이 됐다. 소위 '철강왕'이라는 칭송을 받는 미국의 앤드루 카네기는 당대 35년 동안 연산 1,000만톤을 이뤘지만 박 명예회장은 1968년부터 1992년까지 25년 안에 연산 조강 2,100만톤을 일궈냈다. 기술력과 자본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카네기보다 짧은 기간에 그 두 배가 넘는 규모로 키워낸 것이다. 현재 포스코는 연산 3,700만톤 규모의 조강생산을 기록하는 세계 4위권 철강사로 성장했다. 특히 글로벌 철강사를 제치고 시가총액과 신용등급에서 모두 수위를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