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화 날개없는 추락… 인도 22년 만에 외환위기 가능성

달러 유출 규제가 되레 화불러 금융시장 패닉
싱 총리 구두개입 불구 정책 의구심만 증폭


'자금 엑소더스'를 막기 위해 인도 정부가 쏟아낸 온갖 대책들이 역효과를 내면서 인도 루피화의 '날개 없는 추락'이 지속되고 있다. 루피화 환율이 달러당 62루피를 넘어선 데 이어 65루피까지 시야에 들어온 가운데 시장 전문가들은 인도가 지난 1991년에 이어 다시 외환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를 내놓기 시작했다.

지난 16일 외환시장에서 루피화 가치는 장중 달러당 62.03루피를 기록하며 역대 최저치를또다시 경신했다. 인도 증시의 뭄바이 센섹스지수는 4% 가까이 폭락한 1만8,598.18로 마감, 2년 만에 최저치로 곤두박질쳤다.

루피화 가치 하락은 지난 수개월 동안 꾸준히 진전돼왔지만 이날 급락은 인도 정부가 루피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한 고강도 대책을 내놓은 직후에 전개된 상황이라 시장의 충격을 더했다. 인도중앙은행(RBI)은 앞서 14일 달러화 유출을 막기 위해 인도 기업의 해외투자 한도를 종전의 4분의1 수준으로 줄이고 개인의 연간 송금 가능액수를 20만달러에서 7만5,000달러로 대폭 제한하는 규제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15일 휴장 이후 속개한 시장의 패닉 상황은 정부의 고강도 대책을 단숨에 무력화시키며 정부가 시장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불안감만 확산시켰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인도의 위기가 "외부변수로 시작됐지만 근본적 문제는 내부에 있다"며 "정부 대책이 '절망적인 응급처방' 신호로 읽히는 등 정책 실패에 따른 자본유출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혹평했다.

다급해진 만모한 싱 인도 총리는 17일 TV로 생중계된 기자회견을 자처했다. 싱 총리는 회견에서 "인도의 보유외환은 6~9개월분으로 15일분밖에 불과했던 1991년과는 차이가 있다"며 "인도 경제는 신규 인프라 사업 등에 힘입어 곧 양호한 성장세를 회복할 것이고 1991년과 같은 채무위기는 맞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도는 1991년 보유외환이 크게 줄면서 채무불이행(디폴트) 직전 상황에 다다르자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22억달러의 차관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주요 외신들은 악화되는 경제여건과 정부 정책의 혼선 등을 이유로 인도에서 1997년 아시아에서와 같은 위기가 재연될 가능성에 대한 경고 수위를 갈수록 높이고 있다. 현지 언론들은 달러당 62루피를 넘어선 환율이 조만간 다음 저지선인 달러당 65루피선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특히 전문가들은 정부의 정책 혼선이 경제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질책을 쏟아내고 있다. 6년 전 단행한 금융자유화를 되돌리는 이번 외환규제 조치가 해외자본의 공포감을 부추겨 유출속도를 더 높이게 됐다는 것이다.

루피 절하를 막기 위한 시중금리 인상 조치 역시 시중 유동성을 줄이고 해외 투자가들의 루피화 차입만 가로막았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수차례 실시된 RBI의 시장개입도 별다른 성과 없이 달러 증발만 가속화시켰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국유기업의 외자도입 확대나 귀금속, 외국 전자기기 수입 제한 등의 조치 역시 시장의 혼선을 부추기기는 마찬가지라는 평가다.

인도 상주 IMF 대변인인 토머스 리처드슨은 FT에 "인도 정부가 IMF로부터 별다른 규제조건이 붙지 않는 '오명 없는(no-stigma)' 대출 라인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년 5월 총선을 앞둔 정부가 'IMF행'을 선택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고 FT는 지적했다.

소날 바르마 노무라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인도 당국이 물가나 환율을 억제하려면 단기간에는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정책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며 "내부 출혈부터 막아야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할 비책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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