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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며 IT강호 떠돌던 풍운아 일 내나
[CEO&Story] 허진호 크레이지피쉬 대표아이네트·아이월드 일군 IT 풍운아 이젠 SNS·모바일게임서 미래 찾죠인터넷망서비스·서버 사업 외환위기 이후 잇따라 휘청국내 IT 흥망성쇠 몸소 경험 2년 내 톱5 진입 자신있어
양철민기자 chopin@sed.co.kr
사진=이호재기자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판타지팜, 비바 삼국지, 드래곤 킹덤, 손바닥 삼국지
"정보기술(IT)업계의 풍운아, 허진호 박사님을 소개합니다."
지난 2011년 다음 개발자 콘퍼런스 대담자로 나선 허진호(51ㆍ사진) 크레이지피쉬 대표에 대한 사회자의 소개말이다. 실제 풍운아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허 대표는 국내 IT산업의 흥망성쇠를 함께했다. 그는 국내 IT업계를 이끌고 있는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김정주 넥슨 회장, 김장중 이스트소프트 대표, 배인식 그래텍 대표 등이 큰 형님으로 모실 만큼 신망이 두터운 호인이기도 하다.
평탄한 길을 두고 항상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풍운아' 허 대표를 성남시 분당구 크레이지피쉬 본사에서 만나봤다.
"풍운아요? 뭐 그렇게 어렵게 살지도 않았는데 좀 거창한 별명인 것 같은데요."
허 대표의 웃음 섞인 손사래와 달리 그가 풍운아로 불리는 배경에는 녹록지 않은 삶의 이력이 자리하고 있다. 허 대표는 지난 1983년부터 7년간 KAIST에서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로 알려진 전길남 교수 밑에서 전산학을 배웠다. 전 교수는 그에게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세상은 물론 IT산업 전반을 거시적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시야를 키워줬다. 특히 박현제 전 솔빛미디어 대표, 정철 전 삼보컴퓨터 대표와 같은 벤처 1세대들과 경쟁하며 탄탄한 실력을 쌓았다. 세상에 나서기 위한 혹한 담금질의 과정이었다.
이후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시작한 첫 사업은 1994년 선보인 인터넷망서비스(ISP)업체인 아이네트였다. "전산학을 공부하며 국내 인터넷 시장의 가능성을 높게 봤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4년간 여러 IT업체에서 일하며 경험도 충분히 쌓았고요.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아이네트였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 그대로 승승장구했죠."
외환위기는 아이네트에 직격탄이었다. 투자처를 구하기 쉽지 않았고 서버 비용 등으로 외국업체에 매달 지불해야 하는 40만달러도 큰 부담이었다. 특히 환율이 폭등해 이전보다 2배가 넘는 돈을 해외로 송금해야 했다. 그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지분을 투자자들에게 넘기고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리니지' 개발팀을 엔씨소프트에 매각하기도 한다.
"당시 리니지 개발을 총괄했던 송재경 현 엑스엘게임즈 대표는 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한 후배였습니다. 그런 인연 덕분에 게임 부문을 맡겼던 것이었고요. 하지만 사업이 점점 어려워져 대학교 후배인 김택진 대표에게 리니지 사업부를 넘겼지요. 덕분에 아이네트는 자금 유동성을 확보했고 엔씨소프트는 리니지를 바탕으로 국내 대표 게임업체가 됐으니 서로에게 최선의 판단이었다고 봅니다."
이후 허 대표는 아이네트를 PSI넷에 3,000만달러에 매각하며 인터넷 사업을 정리한다. 창업자였지만 회사를 살리기 위해 지분을 꾸준히 매각한 탓에 그가 손에 쥔 돈은 300만달러 남짓이었다. 그는 또 다른 사업에 나서게 된다. 기업들이 향후 서버를 직접 구축하지 않고 대행업체에 빌려 쓸 것으로 보고 시작한 아이월드가 바로 그것. 하지만 두 번째 도전은 시장의 수요를 제대로 읽지 못해 4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제가 사업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을 꼽으라면 바로 외환위기 당시의 아이네트와 아이월드를 이끌 2000년대 초반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공을 들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몸과 마음이 모두 피곤했던 시절이었죠."
그는 아이월드 대표를 맡고 있던 2003년에는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초대 회장 자리에 오르며 업계 큰 형님의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사업 때문에 정신 없는 나날이었지만 그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주위의 권고가 컸다. 그는 규제기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협회 설립 목적과 달리 인터넷산업 전반의 발전을 위해 정부와 날을 세우게 된다. 이러한 그의 물러서지 않는 곧음이 풍운아라는 이미지를 한결 덧칠하는 데 일조한다.
"협회장으로 처음 취임한 2003년 당시만 하더라도 정부 쪽 사업을 수주해 벌어들이는 수입이 전체의 80% 이상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정부에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판단으로 정부 관련 수익 의존도를 1년 만에 20%대로 낮췄습니다."
그는 인터넷실명제를 막기 위해 정보통신부 고위 임원과 얼굴을 맞대며 토론을 하고 각종 간담회 등에 꾸준히 참석하며 업계 큰 형님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애썼다. 그의 이런 행보에 대해 협회장이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냐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굽히지 않았다. 업계에서 허 대표를 '회장님'이라는 경어로도 종종 부르는 것은 당시 그의 활동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방증이다.
이제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모바일에서 국내 IT산업의 미래를 찾고 있다. 이번 사업이 오디세우스의 항해마냥 15년이 넘도록 많은 곳에 자취를 남겼던 그가 머무를 또 하나의 기항지가 될지 혹은 종착지가 될지 아직 모른다. 다만 그 어느 때보다 이번 사업에 대한 확신은 깊다.
"사람들은 인터넷상에서 SNS을 이용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버스를 타거나 길을 걸을 때도 다들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을 하기 위해 손을 분주히 움직입니다. 크레이지피쉬는 이러한 소셜게임 및 모바일게임을 중심으로 성장해나갈 예정입니다." 크레이지피쉬는 해외 진출도 준비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에 직원을 파견해 현지 시장 진출을 타진하고 있는 것.
그는 모바일게임 시장의 경우 앞으로 2년 내에 시장의 승자와 패자가 판가름 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10여년 전 군웅할거하던 온라인게임업계가 현재는 5개 업체가 주도하는 형태로 고착화됐듯 모바일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재연될 것으로 보는 것. 허 대표는 크레이지피쉬가 상위 5개 업체 중 하나가 될 것이라 자신하고 있다.
"시장이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몇몇 강자가 주도권을 쥐는 형태로 자리잡기 마련입니다. 마치 1990년대 후반 절대강자가 없던 온라인게임 시장이 지금은 일부 게임사의 주도로 변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크레이지피쉬는 게임 퍼블리싱 노하우 등이 충분하기 때문에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10여년째 수염을 기르며 멋쟁이로도 통하는 허 대표. 그가 모바일업계에 어떠한 풍운을 몰고 올지 IT업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허진호 대표는▦1961년 대구 ▦1983년 서울대 계산통계학 학사 ▦1985년 한국과학기술원 전산학 석사 ▦1990년 KAIST 전산학 박사 ▦1994년 아이네트 대표 ▦2000년 아이월드 대표 ▦2003년 한국인터넷기업협회장 ▦2008년 네오위즈인터넷 대표 ▦2010년 크레이지피쉬 대표
독서는 나의 힘인문학 통해 다양한 변수 대응 '료마가 간다'로 기업의 길 찾아애플 폐쇄적 정책 결국 한계 글로벌 IT 패권 구글이 쥘 것"마흔살이 되고 나서는 역사책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허진호 대표는 서른 이후부터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타인의 아이디어를 빌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에 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KAIST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전공책 말고 다른 책은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30대 초반, 다양한 독서를 통한 간접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경영 관련 서적에 매달렸어요. 그때 당시 '한 권으로 배우는 MBA'와 같은 개론서를 많이 읽었습니다."
그외에도 그는 심리학 서적을 꾸준히 탐독했다. 결국 경영이라는 것이 사람을 다루는 일이다 보니 심리학 서적이 필요했던 탓이다. 그때 당시 허 대표가 가장 자주 읽었던 경영서적은 톰 피터스의 '초우량 기업의 조건'. 그는 초우량 기업들의 성공에 기여한 공통요소들을 찾아 자신의 사업에 접목하려 애썼다. 물론 현실은 책과는 조금 다른 세상이었다.
"마흔에 접어들면서 경영학 서적에서 하는 이야기는 다소 결과론적이기도 하고 대부분 엇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부분도 많지 않고요. 그래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결과를 보기보다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뒷이야기들이 문제의 본질에 가까운 사례가 많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됐거든요."
그가 40대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바로 일본의 국민작가인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다. 이를 통해 그는 후진국이었던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바탕으로 어떻게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됐다. 단시일에 급성장한 일본의 사례에서 조그마한 벤처가 대기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우고자 한 것. 실제 '료마가 간다'는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 또한 자신의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책으로 꼽을 정도로 IT업계 종사자들이 필독서로 여긴다.
"이제 인문학의 중요성을 많이 느껴요. 저같이 공대를 나온 사람들은 일을 처리할 때 일명 '공돌이 스타일'이라고도 불리는 수학적인 방식으로 종종 접근하거든요. 그러다 보면 문제 자체만 보게 돼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길 경우 해결책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KAIST를 다닐 당시 은사이신 전길남 교수님이 시스템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 30대 후반에야 그 말의 뜻이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지금과 같이 모바일게임 사업에 뛰어든 것 또한 역사적 교훈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제 막 열린 모바일 세상이 바로 중세 유럽의 '대항해 시대'처럼 한 국가나 기업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시장으로 본 것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우던 인터뷰 말미, 허 대표에게 글로벌 IT업계의 최종 승자는 누가 될지 물어봤다. 그는 과거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MS) 간 IT 패권 다툼에서 MS가 승자로 남았듯 구글과 애플의 대결에서 구글의 승리를 점쳤다.
"비슷한 조건이라면 역사는 어느 정도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애플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통합해 내놓는 폐쇄적인 전략으로 IT업계를 리드하고 있습니다. 마치 1970년대 맥(MAC)을 내놓았을 때와 비슷하죠.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뒤 개방을 내세운 MS에 주도권을 내줍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글은 과거 MS를 연상시키는 개방정책을 바탕으로 모바일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애플은 주춤거리고 있고요. 애플은 또다시 혁신의 아이콘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만 남긴 채 주도권을 내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