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은 이겼는데 2심에선 추가 자료제출이나 자세한 심리도 없이 전혀 반대의 논리로 패소했소. 대체 어느 판사 말이 맞는 건지 대법관님들 판단 꼭 받아 보고 싶소. 그런데 심리는커녕 '상고 이유에 관한 주장은 이유 없다'고 딱 4줄짜리 판결문이 도착하더이다. 질 땐 지더라도 상고기각 이유나 좀 알려 주소."
법원의 마지막 판단을 받아보겠다고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 상고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 아무런 이유나 설명이 없이 갑자기 4줄짜리 심리 불속행 기각을 당할 때 당사자와 변호사는 허탈하다.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대법원 민사사건의 60%가량이 이런 절차를 거쳐 기각된다. '심리 불속행 제도'는 당사자가 제아무리 상고를 해도 대법원이 더 이상 하급심의 잘잘못을 심리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끝내는 제도다. 1994년 업무과중 해소와 소송남발 방지를 이유로 '상고심 절차에 관한 특례법'을 만들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나 국민은 물론 법을 배웠다는 변호사에게도 사법 불신을 초래하는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시행되다가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1990년 폐지된 상고 허가제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최근에는 대법원이 하급심판결을 제대로 심리하지 않아 상급심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니 하급심에서는 판사의 주관적 성향이나 인상에 따라 대강 판결을 하고 만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 불속행 제도'가 어떻게 살아남아 있느냐고 묻는다면 살인적인 사건부담을 이유로 들 것이다. 1년에 3만건이 넘어버린 상고사건수에 비해 대법관수가 14명에 불과해 1인당 3,019건꼴로 사건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사건이 너무 많아 심리 불속행 기각 없이는 재판을 마칠 수가 없다는 속수무책격의 변명으로는 '연민'에 기초한 '동정'을 받을 수는 있겠으나 우리나라 최고법원인 대법원의 위상에는 걸맞지 않다. 얼마 전인 1월13일 대법원은 가인 김병로 서세 50주년을 기리는 추모식을 열어 유족과 함께 법조계 인사들을 초대해 그의 업적과 인품을 기리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가인이 살아 있던 1950~1960년대는, 정치적으로는 혼란스러웠으나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성원이 매우 컸던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다. 사법부 최고 책임자를 비롯한 다수의 구성원들이 과거 독립운동가의 기개와 함께 사법권 독립이라는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질투는 노력을 해야 받지만 연민은 거저 얻는다'고 한다. 이제는 '질투'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국민의 불만과 불신을 해소할 적극적인 조치를 시작할 때다. 대법원은 스스로 국민을 위한 상고심 개선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조만간 대한변호사협회는 각계의 전문가를 모시고 '심리 불속행 제도'를 비롯한 상고심 개선 방안을 찾는 토론회를 개최해 사법 신뢰확립을 위해 함께 고민하려 한다. '나라의 큰 별' 가인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사법부의 서약이 제대로 뿌리내려 꽃을 피우는 새해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