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배임 기로에 선 재계] 계열사 지원안하면 '꼬리 자르기' 지원하면 '배임죄' 올가미

증여 아닌 지분담보 금융거래 절차상 배임죄와 무관한데 회사 부실화 땐 부메랑으로


"위기에 처한 계열사를 지원하도록 하든지, 아니면 그냥 망하게(워크아웃 혹은 법정관리) 하는 것이 좋은지 확실한 스탠스가 있었으면 합니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현행 상법 등 시스템상 위기에 처한 계열사 지원이 나중에 배임죄 부메랑이 될 수 있다며 이같이 하소연했다. 그는 "한쪽에서는 계열사를 위기에서 구하라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배임죄로 모는 현 상황에 대해 아예 확실한 입장을 전달해줬으면 하는 심정"이라고 힘줘 말했다.

실제로 국내외 경기악화로 계열사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기업들이 많지만 배임죄 적용을 놓고 고민에 빠진 기업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일시적인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그룹 내의 책임 있는 경영의 모습으로 지원에 나서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배임죄에서는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이다.

◇잇따르는 계열사 지원=한화타임월드는 지난 1일 한화케미칼로부터 한화생명 주식 1,520만주를 1,079억원에 사들인다고 밝혔다. 또 한화생명이 최근 서울 소공동 한화빌딩 토지와 건물을 한화케미칼로부터 1,255억원에 매입하기도 했다.

이유는 한화케미칼이 2,000억원 넘는 돈을 태양광사업 투자 재원으로 쓰고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한화 관계자는 "한화케미칼은 제조기업이라는 특성상 신사업 추진을 위해 설비 등 대규모 자금투자가 필요하다"며 "지분이나 부동산 등 처분 가능한 자산을 이용해 투자자금을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한항공도 지난달 30일 임시 이사회를 통해 한진해운홀딩스에 1,500억원 규모의 운영자금을 대여해주기로 결정했다. 해운업계가 수년째 불황에 허덕이며 현금창출이 어렵자 그나마 사정이 나은 대한항공이 나선 것이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해운업계 불황에 따른 한진해운의 일시적 자금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한진해운과 주채권은행과의 3자 협의를 통해 한진해운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침체가 이어지고 있는 그룹 내 건설사에 대한 지원은 확산되고 있다. SK그룹은 계열사들이 나서 SK건설의 유상증자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두산건설도 2월 1조원 규모의 재무구조개선안을 내놓았는데 중심에는 역시 형제기업들이 있었다. 두산중공업은 두산건설의 유상증자 4,500억원 중 3,055억원에 참여했고 5,716억원 규모의 배열회수 보일러사업을 현물출자 형식으로 두산건설에 넘겼다. 위기에 빠졌던 두산건설은 이후 숨통이 트이며 부채비율이 546%에서 148%까지 줄어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갖추게 됐다.

◇합법ㆍ배임 기로에 선 재계=계열사 지원은 앞으로 더욱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적지 않은 기업이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기에 금융당국이나 채권단 역시 모기업의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법정관리나 워크아웃에 들어갈 경우 그에 따른 파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같은 계열사 지원이 자칫 배임죄라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진그룹의 경우 대한항공조차 사정이 여의치 않다. 이런 점 등을 이유로 배임죄 가능성이 벌써부터 나오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재계는 배임죄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설명이다. 재계 관계자는 "무담보 증여가 아니라 지분을 담보로 이뤄진 금융거래"라며 "이 같은 담보기반 자금대출이 배임이라면 사실상 대한민국의 모든 금융거래가 불법이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현행법상으로 보면 합법적 절차를 밟았다고 배임죄 성립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결국 배임죄가 여러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누구든 자유롭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고 전했다. 한마디로 절차상 하자가 없어도 회사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알고 지원했거나 아니면 추후 부실화됐을 때 배임죄로 걸면 걸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오리온은 동양그룹 지원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한 이유로 지원시 담철곤 회장을 비롯한 오리온 오너 일가에 배임죄가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거론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오리온그룹의 동양 지원 불가 이면에는 배임죄가 작용하고 있었던 셈이디.

재계는 계열사 지원이 지원하는 기업이나 지원 받는 기업 모두에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주주가치는 더 올라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과거에는 부실기업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을 경우 책임회피, 꼬리 자르기라고 비난하기도 했다"며 "현재 경영상태가 어렵다고 할 때 내버려둘지, 지원을 통해 향후 수익성이 높아지도록 할지는 해당 기업이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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