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것보다 더 싫은 게 비오는 거야.
이번 여름엔 비가 얼마나 더 올런지…"
장마가 한창이던 이달 21일 서울역에서 만리동으로 넘어가는 굴다리에서 만난 노숙자 김모(55)씨는 잔뜩 흐린 하늘을 원망 섞인 눈으로 올려다 봤다.
초라하다 못해 누더기에 가까운 옷차림은 장맛비에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한 탓에 심한 악취를 풍겼다. 누구한테 얻어 맞았는지 얼굴 여기저기엔 핏자국이 눌어 붙어 있었다.
김씨는 "어차피 길에서 자는 잠, 어디서 자나 불편하지만 장마 때는 특히 힘들다"며 "비를 피하기 쉬운 지하도의 명당 자리는 이미 주인이 있어서 안 되고 공사 중인 서울역 구 역사 처마 밑에서 옷이 젖든 말든 새우잠을 청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씨의 말처럼 노숙자들에게 장마철은 혹한기보다 더 힘든 때다.
야외에서 마음 놓고 잘 수 없으니 잠자리도 마땅치 않고 비에 젖은 옷은 늘 축축하다 보니 건강상태가 좋을 리 없다. 툭 하면 감기에 걸리고 원인 모를 통증이 몸구석구석에서 느껴진다.
이따금 공사판 품팔이로 생활비를 벌어오던 것마저 끊기고 만다. 할 일이 없으니 비를 피해 지하도나 건물 처마 밑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대낮부터 술로 시간을 보내기 일쑤다.
서울역 광장에서 노숙을 하는 정모(45)씨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건강을 챙기는 것은 사치나 다름없다.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는 데다 비까지 쏟아져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는 날이면 정말로 처량하다"며 연신 기침을 해댔다.
옆에 앉은 이모(50)씨는 목과 팔에 파스를 붙이고 있었다. 그는 "닷새 전 비가 많이 내릴 때 비를 피하려고 상가 계단에서 자다 굴러 떨어졌다"며 "요즘 같아선 목숨이 붙어 있는 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대합실에서 잘 수도 있지만 의자에 누울 수 없고 수시로 철도공안이 쫓아내 불편하고 지하도에도 사람들이 물을 뚝뚝 흘리고 다녀 잠자리 찾기가 쉽지 않다. 장마철엔 쉼터에도 빈 자리가 없다"며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실제로 서울 용산구 갈월동의 노숙인 이용시설 `다시서기 상담보호센터'에는 3∼4월만 해도 하루 평균 150명이 찾아와 잠을 잤지만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 7월 들어서는 200여명이 찾고 있다.
또 서울역 노숙인 상담소에는 이달 들어 매일 10여명이 쉼터 입소를 문의하지만자리가 한정돼 있다보니 하루 5명 가량만 가까스로 쉼터에 들어갈 수 있다.
다시서기 상담보호센터 김해수 과장은 "7월에 보호시설을 찾는 노숙인이 늘었다가 장마가 끝나고 8월이 되면 다시 야외에서 노숙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며 "장마철에는 특히 노숙인의 건강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보호시설을 이용하는 노숙인 2천600명과 거리 노숙인 600명이 서울에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실제 노숙인 수는 1천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