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니라."
2000년 전 어느 날, 예수는 이스라엘 북쪽의 갈릴리 호숫가에서 이른바 '팔복(八福)'으로 불리는 '산상수훈(산상설교)'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이날의 설교는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큰 줄기를 이루는 것으로 이후 '낮은 곳으로 향하는' 기독교 사상의 뿌리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는 왜 산상설교에서 8가지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언급하지 않았을까. 성공한 사람, 강한 의지로 세상을 사는 사람,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 세상에서 뜻을 이루고 경제적 부를 이뤄 많은 이들을 이 세상의 곤란한 삶으로부터 구하려는 사람은 왜 잊었을까.
힘 있고 이룬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어떤 복을 받을까. 그들은 세상을 이길 만큼 힘 있고 지혜가 있어 하느님의 복이 필요 없는 것일까. 아니면 그 힘과 부와 그리고 우월성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다른 것을 많이 잃어버려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일까. 세상의 가난과 역경을 통해 더욱 높이 드러나는 하느님도 질투하는 것일까.
인간의 유한성과 그 비극성을 준 절대자는 인간이 그 비극을 딛고 승화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성공을 이룬 이들을 축복하기보다는 또 다른 도전으로 몰아넣는다.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는 위로와 행복은 없다. 끝없는 절대성을 향한 완벽으로의 도전이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 세상의 기술적 진보, 통신과 정보의 축적 그리고 그 응용의 획기적 발전은 경제와 부의 축적을 기하급수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시스템화하고 조직화해 우리의 뒷골목 같은 편안한 쉼터를 시스템에서 몰아낸다. 그리고 승자와 패자를 극명하게 만든다. 시스템 안에 살아남든지 아니면 숨을 곳과 위로 받을 곳을 찾아 방황하게 만든다.
누구든 조금은 쉬고 싶지 않을까. 성공을 이뤄온 절대적 노력과 자신감 때문에 성취가 실패를 부를 수 있는 삶의 필연적 비극성을 잊는 것이다.
예수의 '팔복'이 낮은 곳으로 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삶이, 성공과 실패라는 동전의 한 쪽 면과 같은 배타성보다는 저마다의 색깔로 밝게 빛나는 아름다운 단풍 같은 축복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과연 우리의 팔복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