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세계무역기구(WTO),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국제기구가 흔들리면서 국제 협력 `공백`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실제 NATO는 프랑스, 독일이 미ㆍ영 주도의 이라크전에 반대하면서 그 위상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UN의 승인 없이 이라크전을 감행해 승리한 미국은 앞으로도 국제기구를 무시한 일방주의적 외교 정책에 무게 중심을 둘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와 함께 국제기구를 통해 문제 해결이 시도되더라도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진 미국과 유럽 국가간 갈등의 골 때문에 `외교적 합의`라는 국제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그 어느 때보다 외교와 타협보다는 국익과 민족주의가 우선시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
이라크전 승리를 맛본 미국은 앞으로 북 핵을 비롯한 정치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무역분쟁 등 경제 문제에 관해서도 국제기구를 통한 타협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밀어붙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국제무역과 관련, WTO라는 다자간 틀 대신 자신의 입맛에 맞는 국가들과 양자간 혹은 집단간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등 블록 형성에 공을 들일 태세다. 다시 말해 WTO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 도하 아젠다 협상 보다는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추진 쪽에 초점을 맞출 가능성이 높다는 것. 실제 미국 공화당 내에서는 WTO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고 있다.
유럽 국가들의 목소리 높이기와 이에 따른 미국과의 갈등도 국제기구를 사실상 유명무실화하면서 세계질서의 공백을 확산시킬 가능성이 높다. 유럽과 미국간 갈등이 심화될 경우 국제기구는 이들 간의 대리전 장소로 전락하면서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존재로 전락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프랑스ㆍ독일ㆍ러시아 등이 이라크전에서 승리한 미국에 대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조만간 자기목소리 찾기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국가의 민족주의적 정서가 그 어느 때보다 높기 때문. 실제 이라크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른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좌파도 평화주의자도 아니다. 지난 1995년부터 8개월간 반전주의자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8차례의 핵실험을 강행한 프랑스 민족주의 우파의 장본인일 뿐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UN과 WTO가 각각 이라크 재건과 도하개발 아젠다 협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이들 기구의 운명이 결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이 이들 기구를 무시하거나 국제기구가 각국의 성토장으로 전락할 경우 그 존재는 유명무실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국제기구가 이 문제 해결에 역할을 하고, 강대국들이 갈등보다는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그 위상을 재정립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장순욱기자 swcha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