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다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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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가깝게 지내던 한 살 아래 사촌 누이가 있었습니다. 병약했지만 총명했고 책만 파고드는 문학소녀였죠. 열여덟에 세상을 등졌지만 (그녀는) 깊은 잔상을 남겼습니다. 작품 속 소녀의 얼굴에는 늘 그 여동생이 겹쳐집니다.”
떨칠 수 없는 기억이나 덮으려 해도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추억은 작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곤 한다. 소녀와 여인의 인물화를 통해 서정성과 명상적 분위기를 한껏 터뜨리는 중견작가 박항률(59)도 마찬가지다. 신작 40여점을 선보이는 그의 개인전이 4일부터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린다.
목이 긴 갸름한 여인이 모딜리아니를 대표하듯, 고운 한복을 입혀 옆으로 앉힌 여인과 그 곁에 놓인 새ㆍ꽃ㆍ배 등은 ‘박항률표’ 이미지다.
“자연 속에서 침묵하고 사색하는 소녀, 자연과 합일되는 여인은 그리움을 자극합니다. 이들을 통해 질척거리는 세상을 배회하다 만나는 꿈 같은 공간을 보여드리려 합니다.”
작가는 90년대 초반까지는 기하학적 추상화를 그리다 구상 인물화로 급선회 했다. 처음에는 ‘신선도’를 떠올리며 어릴 적 자신을 반추해 까까머리 남자를 그렸다. 여인은 90년대 후반부터 그리기 시작했고, 당시 화가들이 잘 다루지 않던 한복을 통해 한국적 향토미를 덧입혔다. 새와 배는 솟대ㆍ신단수ㆍ성황당 등 민족정서와 기원의 마음을 반영한 것으로 관람객을 세속에서 끌어내 이상향으로 이끈다. 서정성 이면에 역사와 한국 문화에 대한 깨인 시각이 담겨있다.
작가는 옆 얼굴을 주로 그리는 까닭을 19세기 프랑스 화가 오딜롱 르동의 말을 인용해 “정면 얼굴은 ‘나’ 자신, 45도 반측면은 ‘너’를 뜻하지만 완전 측면상은 3인칭의 ‘그’ 또는 ‘그녀’를 느끼게 하기에 아련한 추억 속의 인물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 맞춰 그의 4번째 시집 ‘그림의 그림자’도 출간됐다. 절제된 단어와 침묵으로 의미의 상상력을 열어주는 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번 전시는 27일까지다. (02)7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