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신사 자금담당 임원의 하루또 CP만기 연장요구인가 벨소리만 들어도 "덜컹"
『오늘도 힘든 하루가 되겠군…』
A투신사에서 투자와 자금운용을 맡고 있는 K이사는 꽉막힌 올림픽대로에서 한숨을 몰아쉰다. 뚫릴줄 모르는 길이 회사사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다음달에 돌아올 CP만기는 1조원. 하반기 전체 물량의 80%가 몰려있다. 투자기업 가운데 하나라도 부도가 나면 끝장이다. 혹 돈을 떼이지는 않을까 초조한 마음이 하루종일 억누르고 있다.
간신히 8시쯤 여의도에 있는 본사에 도착해 서둘러 회의를 열었다. 채권운용팀장은 다음주에 만기가 돌아오는 대기업 A, 중견기업 B, 또다른 중견기업 C사의 CP중 B와 C사것을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금 유동성이 부족하다는 게 중요 이유.
개별기업의 리스크를 분석하는 리스크전담팀장은 『B사의 유동성 부족은 일시적인 것 같으니 담보를 잡으면 될 것 같고, C사는 회수하는 게 좋겠다』고 거들었다. 결국 숙의끝에 리스크전담팀장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기업들이 CP만기 연장을 애원해도 돌아볼 여유가 없다. 현금을 마련해 고객들에게 만기자금을 되돌려주기도 벅차기 때문이다.
그나마 만기 회사채가 많지 않아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자금악화설에 시달리는 몇몇 기업들의 회사채를 다량 보유중인 B투신사에 비하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K이사는 아침회의를 마치자, 담배 한개비를 입에 물고 복도 끝에 마련되어 있는 흡연구역으로 간다. 요즘들어 흡연량이 2배로 늘어났다.
기업 자금담당 임원들로부터 쉴새없이 전화가 오지만 비서에게 없다고 하라고 이미 지시했지만 전화 벨 소리만 들으면 깜짝깜짝 놀란다.
금감원 요구사항인 증자문제를 놓고 사장주재 회의에 참석, 또다른 몇건의 회의에 참석했더니 어느새 오후 2시. 오늘도 늦은 점심을 위해 회사근처 식당으로 향한다.
『K, H, D그룹을 포함해 6~7개 대기업이 위기설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시멘트사장단이 최근 긴급히 모여 대책을 논의한다고 합니다』 정보담담자들의 보고를 들은 K이사는 거론됐던 기업들의 리스크를 따져보기 위해 담당 실무진에게 한국신용평가 보고서와 각종 자료를 분석해 확인여부를 지시했다.
『지표상 아직까진 괜찮은 것 같은데요』라는 대답을 들었지만 그저 시장의 루머정도로 묻어두기엔 왠지 찜찜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시. 오후 회의가 곧 시작된다. 안건은 최근 투신권과 정부측이 줄다리기중인 대우 무보증채와 담보CP 정산비율건. 당초 방침대로 무보증채 34%, 담보CP 90%이상 보장에서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을 재천명했다.
담당 실무진은 『정부 믿고 지원했는데, 이제와서 투신권에 손실을 전가하면 누가 정부를 믿고 따르겠냐』며 시장불신을 정부가 초래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실펀드 공개건도 큰 부담이다. 부실내역을 줄이고 고객부담을 최소화시키려면 회사와 대주주에게 큰 부담을 지울 수밖에 없다. 어쩌면 불뚱이 임원들에게 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아찔하다.
결재 등 대충 오후 업무를 끝내니 벌써 7시. 금융기관 기업여신 담당자들과 여의도 국회의사당 근처 한정식집에서 식사를 하고, 회사에 다시 들어와 마무리 점검을 끝냈다.
집에 귀가한 시각은 12시. 요새 애들 얼굴 제대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강 씻고 자리에 눕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7~8월을 어떻게 넘기나』, 『제2의 위기는 오지 않아야 하는데』, 『언제나 두발 뻣고 잘 수 있을까』
몸을 뒤척여 보지만, 머리속에서 뒤엉키는 상념은 쉽게 털어지지 않는다.
홍준석기자JSHONG@SED.CO.KR
입력시간 2000/06/2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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