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준구 '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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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인 '비정한 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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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필 '싱어송(Sing a S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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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일찍이 풍경화나 정물화부터 인물화, 역사화, 종교화 등을 넘나들며 특정한 장소와 그 속에 놓인 사물과 사람, 정황들을 재현해 왔다. 장소는 그 안에서 일어날 일들을 제한하곤 하는데, 그림을 통해 만나는 특정한 장소들은 단순한 감상을 넘어 시대의 흐름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단서로도 작용한다.
우리 시대의 젊은 작가들은 어떤 장소를 어떻게 그려내고 그 안에 무슨 고민을 담아내는지 사간동 갤러리인이 ‘어떤 장소’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신진작가 노준구는 외국 여행 중에 마주친 특정한 장소의 다양한 풍경을 담아낸다. 기차 안에는 맥주를 마시는 친구들과 싸우는 취객이 있고, 떨어진 돈을 주우려 허리를 숙인 젊은 여인은 치마가 너무 짧아 속옷이 보일 정도다. 침대 칸에서 뒹구는 남녀, 화장실에서 ‘싸는’ 사람과 개까지. 기차 안에서 드러난 삶의 단편은 유머러스하면서도 풍자적이다. 장소는 버스터미널과 PC방의 사이버공간까지 다양하다. 영국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한 작가로 일상적 소소함을 표현하는 데 탁월하다.
석고로 만든 소형 건축물을 제품 포장용 플라스틱 케이스에 넣어 전시한 작품은 조종성의 것이다. 제한된 공간에 갇힌 건물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안에서 길들여지고 억압된 것들에 대한 저항을 보여준다.
서상익은 작업실, 방, 전시장 등 자신이 사는 공간들을 그린다. 평범한 화면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야생의 동물들은 길들여지는 것에 저항하는 작가의 고민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이혜인은 “옛 집을 기억에 따라 복원하면서 그것이 참담하게 무너지고 쓸려나간 모습을 함께 그렸다”고 작업 노트에서 밝혔다. 피폐한 이미지와 화사한 색감의 조화가 초현실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전혀 연관없는 사물들이 뒤섞인 이진주의 그림 역시 초현실적이다.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 쓰고 코끼리를 탄 여인, 벗어놓은 구두와 나뒹구는 마이크 등은 작가에게 특정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이자 관람객에게는 상상력과 각자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이정민은 식탁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국회 안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그렸다. 눈ㆍ코ㆍ입이 지워져 모호한 등장 인물들은 거식증이나 우울증 같은 현대인의 정신병리적 증상을 안고 있어 이 시대를 풍자하고 있다.
한성필은 공사현장의 차단막이나 벽화를 촬영한다. 공사가 끝나면 사라질 차단막이고 눈속임으로 실제 새로운 공간이 있는 것처럼 그려진 벽화지만 일종의 공공미술로서 도시인의 꿈을 투영하고 있다.
고층빌딩의 모형들을 옹기종기 모은 정진서는 빌딩 숲을 만들어 냈다. 원래 있던 장소에서 옮겨온 빌딩들은 그 도시에서는 랜드마크였을지 모르나 한군데 모임으로써 장소성과 의미를 잃어버려 그저 그런 건물로 전락한다.
총 8명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는 20일까지 계속된다. 관람료는 무료. (02)732-4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