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 4월 16일] <1672> 1959년 아랍석유회의


산유국들이 뿔났다. 석유 메이저 BP가 1959년 2월 원유 공시가격(Posted Price)을 배럴당 18센트 내렸기 때문이다. 공시가격이란 현물시장의 가격흐름과 관계없는 고정가격. 서방 정유사들과 산유국들이 이익을 배분하는 기준인 공시가격 인하로 산유국들의 원유 판매 수입금이 10%가량 줄어들었다. 산유국들은 분노했으나 한 달 뒤 악재가 하나 더 터졌다. 미국이 국내 유전 보호를 이유로 석유수입 제한조치를 내려 가격인하와 시장축소를 동시에 맛보게 생겼다. 국제석유시장이 이렇게 돌아간 이유는 공급과잉. 2차대전 이후 수요가 급증했으나 초대형 유전이 잇따라 발견되며 1953년부터 공급초과로 돌아섰다. BP와 미국은 관례대로 산유국과의 협의 없이 가격을 내리고 수입을 묶었지만 산유국들도 이전처럼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았다. 산유국이 날린 첫 번째 반격은 1959년 4월16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아랍연맹 석유전문가회의에서 나왔다. 일주일간 이어진 회의는 '석유 메이저가 공시가격을 조정할 때는 산유국과 반드시 협의한다'는 결의안과 함께 '이익배분 비율 재협상과 산유국 간 기구 설치'라는 비밀 신사협정을 낳았다. 메이저들은 산유국들의 권고에 아랑곳없었다. 이듬해 8월 공시가격을 7%가량 추가 인하해 원유 가격이 배럴당 1.5달러대로 떨어지자 카이로 신사협정에 사인했던 5대 산유국들은 9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모였다. 당황한 메이저들은 공식 사과문 전달과 함께 공시가격을 소폭 올려주며 진화에 나섰지만 뒤늦었다. 산유국들은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출범시켰다. 중동 정세와 맞물려 지구촌 전체를 두 차례(1973년ㆍ1979년)나 한파로 내몬 석유위기의 중심에 있었던 OPEC 탄생에는 메이저들의 오만과 타성이 깔려 있었던 셈이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