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1월5일] 부르고뉴 & 낭시전투


스위스군 2만명의 기습에 부르고뉴군 1만2,000여명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무모하리만큼 용감해 ‘무모공’으로 불렸던 제후 샤를도 전사했다. 1477년 1월5일 동틀 무렵 벌어진 낭시 전투는 유럽사의 흐름을 갈랐다. 부자 제후국 부르고뉴는 소멸의 길을 걸은 반면 프랑스는 거대제국으로 커졌다. 스페인 제국의 혈통이 형성되고 네덜란드는 독립의 단초를 얻었다.스위스 동맹도 굳건해졌다. 부르고뉴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독일) 사이에 존재했던 제후국. 프랑스 왕실의 방계였지만 중세 초 사라진 중프랑크 왕국을 복원한다며 프랑스와 맞섰다. 잔다르크를 잡아 영국에 넘기고 처형시킨 것도 부르고뉴다. 스위스와 전쟁을 벌인 이유는 프랑스의 견제. 최고의 상공업 지대였던 플랑드르 지역에서 나오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프랑스 왕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부르고뉴를 누르기 위해 스위스를 끌어들인 것이다. 패전 부르고뉴를 지탱한 것은 두 가지, 결혼과 충성맹세다. 무모공의 스무살 난 딸 마리는 위기상황을 맞아 7년 연하인 오스트리아 왕자와 결혼, 군사적 보호막을 둘렀다. 귀족ㆍ상공인들도 마리에게 복종을 맹세하는 대가로 지역의 자유와 자치권을 얻었다. 지역자치권을 규정한 ‘대특권 조항’은 훗날 네덜란드 독립으로 이어졌다. 생존 노력에도 영토는 갈갈이 찢어졌다. 결혼 5년 만에 마리가 사망한 후 프랑스는 부르고뉴 땅 절반을 챙겼다. 비운의 마리가 낳은 두 아이는 스페인 제국과 오스트리아를 대대로 지배했다. 중세의 끝을 태우고 사라진 부르고뉴의 흔적은 명품 와인과 당시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다는 궁전을 비롯한 문화유적에 살아 숨쉰다. 또 있다. 유럽연합의 행정ㆍ입법ㆍ사법부가 위치한 브뤼셀ㆍ스트라스부르ㆍ룩셈부르크는 하나같이 옛 부르고뉴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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