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1월22일 오전9시, 아프리카 남부 이산들와나. 평원을 가득 메운 2만여명의 줄루족 전사들이 1,800여명의 영국군을 덮쳤다. 11배가 넘는 병력차에도 영국군은 오히려 반겼다. ‘짧고 비용이 덜 드는 승리의 기회’로 여겨서다.
오후2시께 끝난 전투의 결과는 줄루족의 압승. 영국군은 1,329명(원주민 기병대 471명 포함)의 전사자를 내고 쫓겨났다. 몇 시간 뒤 인근 로크스 드리프트에서 영국군 120명이 또 다른 줄루족 2만명과 사투를 벌인 끝에 물리쳤지만 이산들와나에서 창과 도리깨ㆍ방패로 무장한 ‘미개한 흑인 군대에게 대영제국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영국은 물론 유럽에도 충격을 안겼다. 유럽 각국은 이때부터 연발소총과 기관총 개발, 보급을 서둘렀다.
전투 이후 줄루족은 영국과 비교해 손색 없는 장비를 갖췄지만 결국 5개월 후 증강된 영국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노획한 소총과 대포를 쓰지 못해서다. 줄루족은 결국 13개 소국가로 분할되는 운명을 맞았다.
영국은 왜 줄루전쟁에 나섰을까. 백인 정착민들의 끝없는 목초지 요구와 거대한 남아프리카 식민제국을 세워 총독으로 부임하려던 현지 고위관리의 야심 탓이다. 본국과 현지 군납업자들의 부추김도 개전의 요인으로 꼽힌다. 525만 파운드가 들어간 줄루전쟁 비용의 절반 이상이 해운회사와 현지 운송업체에 돌아갔다.
아프리카 원주민 군대가 유럽을 상대로 싸운 전투 중 최대의 승리라는 이산들와나 전투 130주년. 탐욕과 특정 이해관계자의 꾐으로 전쟁이 일어나는 구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국이 이라크라는 수렁에 빠져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는 와중에서 군납업자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패했던 영국군 웨일스 보병연대의 일부는 요즘 이라크 바스라에 주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