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자금 저항 이유있다

미국이 쌍둥이적자로 시달리던 80년 중반의 일로 기억된다. 당시 미국 TV에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꼬마가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를 호되게 꾸짖는 프로그램이 방영돼 눈길을 끌었다. 배경은 대충 이랬다. 할아버지 세대가 자신의 소득이상으로 흥청망청하는 바람에 엄청난 빚을 물려받게 된 후손이 선조들을 원망하는 것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후손이 겪을 고통을 생각하지 않고 막대한 부채를 물려주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합리할 뿐 아니라 부도덕한 짓이라는 메시지 전달을 통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적자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아직 후손에게 손가락질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국가부채가 급속히 늘면서 채무관리가 새로운 과제로 부상되고 있다. 외환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된 가운데 실업대책을 위한 적자예산 편성, 공공기관 차입에 대한 정부 보증 등이 크게 늘면서 국가부채가 어느새 200조원을 넘어섰다. 국민 한 사람당 약 500만원씩 돌아가는 규모이다. 공적자금만 해도 회수불가능한 것으로 추정되는 69조원 가운데 49조원을 재정에서 갚는다는 계획이다. 25년 동안 갚아 나가는 경우 원금만 따져도 매년 2조7,000억원이 넘는 재정에서 염출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세수를 늘리든지 지출을 줄이는 것 외에 달리 묘수가 없다. 정부가 내놓은 내년 세제개편안을 보면 마침내 공적자금에 따른 국민 부담이 가시화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세수를 늘리기 위해 기업에 대한 각종 조세감면이 대폭 축소되고 근로자를 위한 세우대 저축 등도 없애기로 했다. 세수증대를 위해 그 동안의 감세정책 기조를 포기한 셈이다. 정부의 씀씀이는 갈수록 늘어나는데 공적자금 상환부담까지 겹치다 보니 우선 세수부터 늘리지 않을 수 없는 정부의 입장에 이해는 간다. 그러나 기존 세제와 세원관리가 허점투성이임을 입증하는 사례가 잇달아 터져 나오고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기존 세제를 바탕으로 공적자금을 비롯한 국가부채를 갚는 것이 과연 공평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모든 행정력이 동원되다시피 하고 있는 부동산투기만 해도 그렇다. 국세청이 부동산투기 혐의자에 대한 자금출처조사에 들어가면서 밝힌 대로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 부부의 소득신고가 불과 수백만원에 불과하고 아파트를 수십채씩 가지고 있는 사람이 무소득자로 세금을 한푼도 안내도 아무 탈이 없는 것은 세제와 세원관리가 얼마나 허술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세의 30%도 안되는 가격에 세금을 매기는 부동산관련 세제도 이해가 안되기는 마찬가지다. 아파트나 부동산 가격조사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부동산투기바람이 번질 때마다 법석을 떨면서도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이유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수억원짜리 아파트 재산세가 중고차 재산세보다 적게 해놓고 투기를 하지 말라는 것도 우습기는 매 한가지다. 부동산을 비롯해 고소득 전문직종과 자영업자 등에 대한 세원관리와 과세가 유리알지갑으로 비유되는 월급쟁이의 절반만 돼도 공적자금 상환을 비롯한 국가채무 관리가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세제와 세정이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그대로 두고 세금만 더 걷는 경우 조세형평성은 더욱 악화될 것이 뻔하다. 공적자금 상환을 비롯한 국가채무를 갚는데 안 그래도 세부담이 상대적으로 무거운 봉급생활자에게 더 부담을 지우는 것은 불공평한 짓이다. 경제가 살아나 부동산투기로 떼돈을 번 사람도, 아파트가격이 많이 올라 부자가 된 사람도 공적자금의 수혜자이기는 마찬가지다. 공적자금의 부담을 공평하게 나누어 질 수 있도록 세제와 세정의 개선이 요구된다. 대다수 국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초조감을 불러일으키고 땀 흘려 일할 의욕을 꺾는 부동산투기도 함께 잡을 수 있는 세제 개편이라면 더욱 바람직하다. 공적자금과 국가부채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후손에게 지나치게 부담을 지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당대의 불공평한 분담?더 나쁜 일인지 모른다. document.write(ad_script1); ▲Top | | ||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