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9월20일 로마. 아우렐리안 성벽에 포탄이 떨어졌다. 3시간 동안의 포격으로 성벽이 갈라지자 이탈리아군 5만여명이 시내로 들어왔다. 이탈리아 통일이 비로소 완성된 순간이다. 국토통일운동이 시작된 1820년으로부터 50년, 통일선언(1861년)으로부터는 9년 만이다. 통일 이탈리아왕국은 애초부터 로마를 왕국의 수도로 지정했음에도 왜 입성하지 못했을까. 교권과의 갈등 탓이다. 입헌정치와 자유주의 사상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교황 피우스 6세는 ‘로마는 하나님의 땅’이라는 명분 아래 편입을 거부하며 프랑스군까지 끌어들였다. 프랑스군을 의식해 진군을 주저하던 이탈리아는 프로이센의 침입을 받은 프랑스가 로마 주둔군을 빼간 뒤에야 시 외곽에 군대를 포진시켰다. 9월 초 프랑스가 세당 전투에서 프로이센에 대패한 후 이탈리아는 벼르고 별렀던 로마 진군을 결행했다. 피도 흘렀다. 교황의 스위스 근위대와 프랑스ㆍ오스트리아의 가톨릭 의용병 1만4,000여명이 초반에 저항해 이탈리아군 49명, 교황군 19명이 사망했다. 통일은 또 다른 분란의 씨앗을 심었다. 교황의 협조거부 때문이다. 로마의 이탈리아 편입이 국민투표로 결정된 후에도 교황은 신도들에게 이탈리아 정부에 맞서라고 부추겼다. 교황청이 이탈리아와 화해한 것은 1929년. 독재자 무솔리니와의 라테라노협약을 통해 바티칸 국가가 특별 존재임을 인정 받은 후에야 교권과 속권의 분쟁이 끝났다. 교회가 통일정부에 등을 돌렸던 세월 동안 저항이 심했던 곳은 열성 신도가 많았던 남부 지역. 경제개발도 자연스레 북부에 집중됐다. 북부와 남부의 경제력 격차도 더욱 벌어졌다. 요즘은 지역갈등을 넘어 분리독립 주장까지 나오는 판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변화를 거부했던 후유증을 아직까지 앓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