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지난 99년 처음으로 칠레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할 때는 협정문 초안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김종훈 한미FTA 우리측 수석대표가 최근 기자브리핑에서 한 말이다. 김 대표의 이 발언은 우리나라가 싱가포르, 아세안(ASEAN) 등과의 FTA 협상을 거치며 이제는 상당한 FTA 역량을 축적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는 85년 이스라엘과 FTA를 체결하고 94년 캐나다ㆍ멕시코와 FTA를 발효한 자유무역의 선봉장 미국에 비하면 ‘한국의 FTA 추진능력은 어느 정도나 될까’ 하는 의문에 상당한 답을 시사해주는 사례기도 하다. FTA를 둘러싼 양국간 극명한 경험차로 이번 협상에서 상당수 어젠다에 미국식 색채가 강하고 우리측이 이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러한 미국적 색채의 대표적인 예로 ▦투자자의 정부제소권 ▦미국의 신금융서비스 수용 여부 ▦일반 서비스 분야의 현지주재의무 부과금지 ▦투자 분야의 이행의무 부과금지 등이 꼽힌다. 특히 1차 협상 전부터 제기된 ‘투자자의 국가제소권’ 인정문제에 대한 논란은 갈수록 확산되고있다. 멕시코ㆍ캐나다 등은 미국과 체결한 나프타(NAFTA)에서 투자자의 정부제소권을 인정, 자국의 환경정책 집행에 막대한 장애를 입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통상교섭본부는 이에 대해 “미국이 맺은 대부분의 FTA에 관련 조항이 있고 우리나라 역시 칠레ㆍ 싱가포르 등과 체결한 FTA에도 이 조항을 넣은 바 있다”고 일축하고 결국 초안대로 1차 협상에서 합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태욱 한림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투자자의 국가제소권 인정은 세계은행도 미국식 FTA의 전형으로 분류할 정도”라며 “유럽연합은 이 같은 조항을 FTA에 넣지 않고 있다”고 정부 주장을 반박했다. 또 ‘칠레ㆍ싱가포르와의 FTA에 넣었으니 미국과의 FTA에 넣는 것도 문제가 없다’는 정부 주장에 대해 최 교수는 “FTA는 상대국 특성에 따라 다르게 맺어져야 한다는 기본 인식도 외면한 것”이라며 “칠레ㆍ싱가포르와는 별 문제가 없는 조항이 미국의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정부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지난주 1차 협상에서 미국 측은 이 조항과 관련, “투자자의 권리와 관련된 모든 분쟁이 분쟁해결 절차의 대상이 되도록 해야 한다”며 “한 술 더 뜨고 나왔다”고 협상단의 한 핵심관계자가 귀띔했다. 미국 측은 앞선 법률서비스를 믿고 차별적 요소가 있을 법한 국내 규제나 정책에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분쟁화해 정부의 정책변화를 유도하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호주가 ‘투자자의 국가제소권’을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여겨 협상력을 총동원해 아예 이 조항을 제외시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금융서비스 이슈 역시 한국의 금융기관을 압도하고 있는 미측 금융업체가 파생상품 등 신금융상품 시장을 독식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일반 서비스 분야의 현지주재의무 부과금지 역시 경쟁력이 앞서 있는 미국계 기업이 우리나라 현지에 지점ㆍ대행사 없이도 영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아 미측에 훨씬 유리한 부분이다. 일각에서 협상단을 향해 “친미적 경제ㆍ외교통상 관료들이 알아서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모욕적 발언을 하는 것도 FTA의 주요 이슈에 미국식이 강하게 스며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통상교섭본부가 한미 FTA를 전격적으로 추진해 연구가 부족했던 것이 문제의 원인 중 하나”라며 “정부 내에서도 이를 분명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적지않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