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혁의 국제 금융시장] 9. 밖에서 본 자화상
해외서도 국내영업하듯…수익저조
'우물 안 개구리'. 해외에 나가 본 금융인들이 말하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인력의 자질, 일에 대한 성실함과 열정.. 어느 한 구석에서도 국제금융의 경쟁에서 버텨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지 못했다는 얘기다. 외형상으로는 세계의 주요 금융시장에 진출하고 있지만 국제영업보다는 국내영업의 연장선에 있는게 현실이다. 세계시장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조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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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자와 적자'.
국내에 들어와 영업중인 외국계은행과 국내은행 해외점포의 실적은 간단하게 설명된다.
흑자와 적자라는 것이다. 서울서 장사하는 외국은행들은 돈을 벌어들인 반면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계 금융회사들은 까먹기만 했다. 그 금액차이가 엄청나다. 지난 97년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46개 외국계은행들의 누적 당기순이익은 2조3,275억원.
반면 같은 기간중 국내은행 해외점포가 벌어들인 돈은 한 푼도 없다. 오히려 2조4,159억원 적자를 발생시켰다.
국내 은행들은 부실 심화 원인을 경기침체와 기업 도산의 증가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그렇다면 경기가 좋은 선진국에 주로 진출한 해외점포는 성적이 좋아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해외점포중에서 수익을 내는 곳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오히려 점포 단위당 부실은 국내 점포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무엇이 극과 극의 성적표를 낳았을까. 실력이 그만큼 모자란 탓이다. 홍콩 금융가에 '김치 딜(Deal)이라는 말이 있다. 홍콩에 나온 한국 금융회사들이 외국인들과 거래하기 보다는 한국기업이나 다른 은행과의 관계에만 열중하는 것을 빗댄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계 은행들끼리 거래하면서 서울에서 할 것이지 외국까지 나와 그 것 밖에 못하냐는 비아양이 깔려 있다.
"대학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졸업후 은행에 입행했을 때 세계수준과 견주어 본 나의 경쟁력은 최고수준이라고 자부했다. 은행의 배려로 해외유학까지 다녀왔을 때도 자부심심도 고조에 달했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해외점포에 처음 발령받고 나서 경쟁력 얼마나 없는지 통감할 수 있었다". E은행의 국제금융통으로 불리는 K상무의 말이다.
국제금융은 환율과 투자, 대출 리스크를 종합관리하는 능력에서 성적차이가 나게 마련.
그런데 이런 능력을 갖춘 금융회사는 거의 없다. 따라서 해외점포의 대부분은 현지 외국금융회사의 도움을 구하는 게 보통이다. 말이 도움이고 코치지 실은 브로커의 도움으로 해외자산을 운용하는 셈이다.
더욱이 본점 차입이든 해외증권 발행 등을 포함하는 현지 조달이든 자금 조달코스트가 외국금융회사보다 높아 고위험자산에 투자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인데도 리스크 측정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스레 외국인 브로커의 투자조언에 매달릴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고위험을 안고 투자할 수 있는 대상이란 한정돼 있다. 때문에 어느 한 곳이 투자하면 너도 나도 달려들어 과열 경쟁을 펼치는 게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 외환위기 직전의 태국ㆍ인도네시아 투자열풍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인은 일벌레'라는 말도 국제금융시장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거액이 오가는 시장에서 외국인 전문가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침식을 잊어가며 거래하는 게 습성화되어 있다.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는 것은 보통이다. 대부분의 딜러가 30대 이하의 젊은 사람이라는 점도 체력이 없으면 시장거래가 불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전문성 결여와 높은 조달 비용이라는 한계는 결국 거래선을 '검정머리'로 국한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계 금융회사끼리 거래하거나 교민 상대의 영업에 머문다는 얘기다. 말로만 국제금융이지 장소만 외국일 뿐 실제는 국내와 비슷한 거래가 발생하는 것이다.
금융감독원 국제감독국 관계자는 "현지에서 투자 대상을 찾지 못하고 현지에 진출한 국내기업이나 교민에게 대출하는 경향이 많다"며 "현지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국내 A은행이 발행하는 해외증권을 B은행 해외점포가 사주거나 해외점포끼리 서로 돈을 오가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때문에 국내기업에서 부실이 나타나 은행이 타격을 입으면 해외점포도 자동적으로 악영향을 받게 된다. 한보ㆍ기아ㆍ대우 등 대기업 부도가 날 때마다 해외점포에서도 이들 기업 관련 부실보고서가 줄을 잇는다.
이들은 발행한 채권을 해외에서 인수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당국이 지난 98년말 '해외점포의 특정국가 유가증권에 대한 투자비중이 30%를 넘지 않도록 규제한 것도 이 같은 본지점간 부실연계고리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정국가'란 바로 한국이었고 이를 지칭하기가 낯 뜨거워 특정국가로 지칭한 것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점포 개설 자체가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때도 많았다. 대통령이 순방하고 난 국가에는 반드시 은행의 해외점포가 생겨났다. 동남아시아ㆍ아프리카ㆍ중남미에 세워진 은행점포는 대부분 '순방외교의 성과물'로 개설된 것들이다. 지금 이들 점포는 최우선 정리대상에 올라 있다.
해외점포의 현실은 한국금융시장의 구조적 문제점의 축소 복사판 격이다. 국내에서도 객관적 분석보다는 연줄로 대출이 발생하고 입지 조건보다는 행장이나 임원의 이해관계에 따라 점포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수한 인력이 해외에 나가서는 아무런 일도 못하는 것도 '은행은 천재를 둔재로 만드는 곳'이라는 말과 똑같다. K상무는 "문제점을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바깥에서 보니 훨씬 더 잘보였다"며 "현실을 직시하고 안팎의 경쟁력을 정비하는 게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권홍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