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월가] <상> 미국 금융패권 추락

달러 앞세운 세계 신질서 구축 꿈 '물거품'
리스크 무시하고 단기수익 치중…신뢰도 추락 자초
금융시스템 살려내도 예전 영향력 유지할지 미지수
막대한 외환 보유한 中·중동 산유국 등 입김 세질듯

지난 1990년대 초 미 중앙정보국(CIA)은 최대 적대국이었던 소련이 붕괴하자 “글로벌 경제에서 강력한 금융의 힘이 유일한 무기”라며 금융 패권을 일본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한 전략을 마련할 것을 백악관에 건의했다. 그후 1991년 2월 미 재무부는 금융산업 경쟁력 약화가 미국 경제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판단, 금융산업 체질개선에 관한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1992년 집권한 빌 클린턴 대통령은 CIA와 재무부의 보고서를 그대로 이행했다. 1930년대 초 대공황 때 만들어진 규제 위주의 금융 관련 법률을 폐기하고 금융산업 규제완화를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미국의 금융 빅뱅은 금융기관 간 대대적인 인수합병(M&A) 열풍을 빚어냈고 뉴욕 월가의 5대 빅브러더스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던 뉴욕 월가의 시스템이 10여년 만에 붕괴 직전에 있다. 빅5 중 3개의 이름이 사라졌고 2위인 모건스탠리가 인수자를 찾으면 골드만삭스만 남는다. 기실 월가의 신뢰도 추락은 자초한 결과다. 그동안 위험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과도한 차입경영을 통해 단기수익을 올리는 데 치중해온 월가의 ‘고위험 고수익(high-risk high-return)’ 사업모델은 금융기관들의 부실을 부풀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리먼브러더스다. 2007년 말 주주들의 자금은 230억달러밖에 안 됐지만 주식과 채권 등에 투자한 자금규모는 7,000억달러로 차입비율이 무려 30대1이나 됐다. 이런 상태에서 자금사정에 문제가 생기면서 바로 생존이 위협 받는 절박한 상황으로 이어지고 그 사정을 아는 금융기관들이 서로를 믿지 못해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하기를 꺼리는 신뢰의 붕괴 현상이 일어나 몰락으로 귀결됐다. 로버트 새뮤얼슨 워싱턴포스트(WP) 객원 칼럼니스트는 기고문에서 “월가의 높은 차입비율이 위기의 싹을 틔웠다”면서 “이런 방식의 차입투자는 시장이 호황일 때는 엄청난 수익을 안겨줄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자본잠식은 물론 결국 퇴출되는 운명에 처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월가의 추락은 미국의 금융 패권 상실을 의미한다. 그동안 뉴욕 금융가가 글로벌 금융시장을 지배하는 단일축 역할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미국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과 뉴욕 월가의 금융파워를 이용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임을 자랑해왔지만 그 축의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 셈이다. 월가의 붕괴로 미국이 금융자본을 이용해 군비 대결에서 벗어난 신질서를 지배하려던 계획도 이제는 대재앙으로 다가왔다. 월가 은행들은 스스로 자구책을 만들지 못해 중동 오일머니와 막대한 중국의 외환을 얻으려 다니다가 퇴짜를 맞았고 파산 직전의 리먼브러더스는 한국산업은행에 손을 내밀다가 실패해 문을 닫고 말았다. 미국 금융위기는 멀리는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달러 불태환 정책을 선언해 금본위제도를 폐기하면서 그 싹이 보였다. 그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인플레이션 정책을 채택해 달러를 찍어 통화량을 부풀렸고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의 팽창은 주식시장에서 부동산ㆍ상품시장까지 곳곳에서 붐 버스트(boom bust) 현상을 일으켰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자본주의의 최대 적이 사라지면서 형성된 글로벌 단일시장은 월가 금융인들이 주창해온 글로벌리제이션 체제를 구축했고 그후 전세계 금융시장이 월가의 눈치를 보는 이른바 동조화 현상을 빚어냈다. 1990년대 말 미국이 대공황의 유산인 글래스-스티걸 법안을 폐기함으로써 금융기관의 무한 팽창을 유도했고 그 결과는 작금의 월가 추락의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1조달러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뉴욕 금융시스템을 살려낸 후에도 세계 금융시장의 지배력을 유지하는지 여부다. 금융사를 전공한 리처드 실러 뉴욕대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월가의 위기에 대해 “지난 20년간 자유시장경제에서는 정부 개입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지금은 시장이 문제이고 정부가 해결책이 됐다”고 평가했다. WSJ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수준인 ‘검은 9월’의 금융위기가 정부로 하여금 가장 강력한 시장개입 방안을 마련하도록 만들었다면서 최근의 사태는 미국 자본주의 발전의 ‘결정적인 전환점(decisive turn)’을 기록했다고 진단했다. 월가의 추락은 중국ㆍ중동 산유국이 중심이 된 아시아로 눈을 돌리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금융기관과 자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아시아 투자가들이 미국에 대한 투자를 재고하기 시작했으며 러시아나 중국ㆍ중동 등이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바탕으로 글로벌 금융계에서 파워를 행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홍콩 투자자문사인 헨데일그룹의 헨리 리 이사는 “아시아의 상당수 투자가들은 아시아 각국이 미국보다 먼저 경기침체에서 벗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먼지가 가라앉고 나면 아시아가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중국 중앙은행인 중국인민은행의 외환보유액이 1조8,000억달러에 달하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금융위기 상황에서 현금이 왕이라면 아시아 정부와 금융기관들은 황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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