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I의 과기향기] '한국의 파브르' 나비박사 석주명

한국산 나비 분류·연구에 한평생 외국학자들 잘못된 학명 바로잡아


유리창나비, 수노랑나비, 도시처녀나비, 깊은산부전나비, 점선나비 등. 일제 치하 혼란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인 잃은 산하를 떠돌던 조선의 나비들에게 ‘이름(학명)과 주소(분포도)’를 찾아주는 데 일생을 헌신했던 석주명. 그는 우리 현대사 초창기의 몇 안 되는 별이다. 특히 자연 과학 분야에서 세계에 떨친 그의 업적은 일제의 암흑기를 빛낸 눈부신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나비 박사’라 일컫는다. 석주명은 1908년 11월 13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26년 3월 일본에서 손꼽히는 농업전문학교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의 관문을 뚫은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서 유학길에 올랐다. 졸업 후에는 모교인 송도중학교 생물교사로 부임하여 10여년간 근무하면서 나비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석주명은 나비에 씐 사람이었다. 그는 한반도 전역을 훑으며 75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했다. 희귀종을 쫓아 흑산도까지 배를 타기도 했다. 송도고보의 학생들에게는 방학만 되면 나비를 2백 마리씩 채집해오라는 숙제를 냈다. 그와 학생들이 발로 뛴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송도고보의 박물관은 온갖 종류의 나비표본으로 가득 찼고 개성의 명소가 됐다. 그는 채집여행에서 돌아오면 밤낮없이 채집한 것을 모두 정리하여 지도에 표시하였는데, 훗날 그렇게 해서 탄생한 <한국산 나비 분포도>는 생물지리학상 세계 학계의 유례가 없는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석주명이 나비연구를 시작할 즈음인 1930년대 초반에는 이미 한국산 나비에 대한 외국학자들의 연구가 50여년 정도나 축적돼 있었다. 당시까지 나비 연구자들은 몇몇의 개체만을 채집하고 관찰해서 조금만 다른 형태가 발견되면 무조건 ‘신아종, 신변종’을 발견했다고 발표하고 바로 자기 이름을 붙인 새 학명을 명명했다. 그러나 석주명은 한국의 나비에 대한 외국인들의 연구 중 상당부분이 잘못돼 있다고 생각하고, 외국 학자들에게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은 개체를 채집하여 기존에 등록된 종이나 아종 나비가 단순한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종마다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혀 잘못된 학명을 제거해 나갔다. 개체변이란 생물들이 성장하는 환경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상이한 변이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결국 석주명은 10년 연구 끝에 1940년 <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통해 일본 학자들이 같은 종인데도 다른 엉터리 학명을 붙여 844종이라고 분류한 한국나비를 248종으로 최종 분류함으로써 한국산 나비의 새로운 분류학 시대를 열었다. <조선 나비 총목록>은 한국인의 저서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도서관에 소장됐으며, 이로써 석주명은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석주명은 나비 연구에서는 세계적인 학자였지만 개인생활은 실패했다. 삶의 모든 부분을 나비에 바친 그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죽음마저도 비참했다. 그는 광주학생항일운동,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나비의 꿈만을 꾸었다. 전쟁에도 피난을 가지 않고 박물관의 나비 표본을 지켰다. 하지만 끝내 시대의 격랑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1950년 9월말 집중된 서울시내의 폭격으로 국립과학관이 불타는 바람에 그가 20여년간 수집한 그의 분신과도 같은 나비 표본이 모두 한줌의 재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나비들이 모두 불탄 열흘 뒤(1950년 10월 6일), 과학관 재건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가던 그는 인민군으로 오인 받아 불의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그가 총구를 겨누는 청년들에게 외친 최후의 한마디였다 (글 : 김형자 –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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