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최대 채권투자회사인 핌코는 지난 1일 "영국의 신용등급이 1년 내로 하향조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국의 심각한 공공부채가 인플레이션과 통화가치 하락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영국의 재정적자는 2009 회계연도(2009년 3월~2010년 3월)에 1,780억 파운드(약 305조원)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11.7%에 달한다. 주요7개국(G7, 미국ㆍ캐나다ㆍ프랑스ㆍ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ㆍ영국) 중 최대 비율이다. 하지만 문제가 재정적자 뿐만인 것은 아니다. 제조업 등의 기반이 삐걱대면서 영국 경제의 잠재적인 성장 여력이 쇠약해졌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타임, 이코노미스트 등 각종 주간지가 최근 앞다퉈 황폐해진 영국 경제를 조명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우울한 각종 지표=최근 영국의 경제지표는 런던의 하늘만큼이나 우중충하다. 경제규모로만 봤을 때 영국은 여전히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지만, 규모가 아니라 내실을 보면 전망이 밝지 않다. 2009년 총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5%로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을 기록했다. '경기침체'로 분류되는 시기가 6분기에 달해 주요7개국(G7) 국가 중 가장 긴 것으로 나타났다. 실업률은 지난해 6월부터 7.8~7.9%를 오가면서 좀처럼 2008년 초 수준(5.2%대)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가뜩이나 경제도 나쁜 상황에"영국이 지난 10년 이상 내실 없는 성장을 계속해왔다"며 영국의 경제구조 자체를 문제시하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질소득 증가(1995년~2009년 사이 75%)가 소비 증가(101%)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이 근거다. 소비자들이 빚을 내 돈을 썼다는 이야기다. 영국민들의 저축률은 가처분소득의 9.6%(1997년)에서 고작 1.5%(2008년)로 떨어진 상태다. ◇제조업 쇠퇴가 원인=가디언 등 영국 언론들은 제조업이라는 기반이 부실해지면서 영국의 미래도 흐려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때 이 나라 제조업의 상징이었던 도시 대거넘(Dagenham)은 영국 제조업의 현주소를 여실히 드러낸다. 영국 런던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거넘은 1931년 미국의 포드 자동차가 유럽 최대 규모의 공장을 세운 장소였다. 중소 자동차부품업체와 각종 제조업체들도 쉬지 않고 공장을 돌렸다. 1960년대 전성기 때는 대거넘의 포드 공장 한 곳에서만 4만 명의 근로자가 일했으며 연간 34만대 이상의 자동차가 생산됐다. 하지만 지금 대거넘엔 4,000명이 일하는 포드의 디젤엔진 공장 하나만 쓸쓸하게 남아있다. 제조업의 쇠퇴에는 금융에만 치중한 마거릿 대처, 토니 블레어 등 전 총리들의 책임이 크다는 분석이다. 대처 전 총리는 지난 1986년 금융규제를 대폭 완화해 영국 금융업계를 키웠다. 지난 2007년 퇴임한 토니 블레어 전 총리도 '시티(Cityㆍ영국 금융계를 뜻함)'의 '나홀로 성장'을 방치했다. 당시 블레어 정부의 경제고문으로 현재 기업부장관을 맡고 있는 피터 만델슨은 "당시 블레어 정부는 금융계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부자가 되도록 방치해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제조업이 등한시되자 생산력도 떨어졌다. 캠브리지 대학교의 로버트 로돈 경제학과 교수에 따르면 지난 20세기의 마지막 25년간 미국과 영국의 제조업 부문 생산효율성은 분명 늘어났다. 하지만 미국 근로자들의 생산효율성은 영국 근로자들보다 두 배 이상 높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세계화의 선두주자'에서 '피해자'로=영국의 기업과 공장이 해외로 떠나면서 영국 경제가 '공동화'됐다는 지적도 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화(Globalization)의 선두주자였던 영국은 이제 세계화의 피해자가 됐다."이코노미스트 지(誌)의 평가다. 상품ㆍ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무한에 가까운 시장경쟁을 역설하던 영국이 최근 잇따른 자국 기업들의 피(被)인수로 일자리 감소 등을 걱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정보업체인 딜로직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외국인이 영국에서 사들인 기업 수는 5,400개, 여기에 투자한 자금은 1조 달러에 달했다. 반면 영국인들이 해외 기업 인수에 쓴 돈은 7,500억 달러로 더 적었다. 영국의 높은 인건비 등을 견디다 못한 수많은 기업 본사도 문을 닫고 해외로 중심 사업부를 옮기면서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영국 식료품업체인 캐드버리가 미국의 크래프트에 인수된 일을 꼽을 수 있다. 덴마크 맥주회사인 칼스버그와 네덜란드의 하이네켄도 지난 2~3년에 걸쳐 영국의 스코티시&뉴캐슬을 공동 인수한 바 있다. 캐드버리와 스코티시&뉴캐슬은 각각 1824년, 1749년 설립된 영국의 국민기업이었지만, 이젠 마냥 영국인들을 위해 일자리를 만들어줄 수는 없는 신세가 됐다. 캐드버리는 곧 크리스톨 부근의 공장 한 곳을 폐쇄할 예정이다. 문제는 해외 각국이 영국처럼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일례로 미국의 경우 여전히 포이즌필(적대적 인수합병 등을 대비해 기존 주주들에게 지분매입권을 주는 제도) 등의 경영권 보호수단이 합법이고, 유럽 대기업들의 경우 오너 가문이 소수 주주일지라도 강력한 의결권을 가질 수 있어 경영권을 꽉 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영국 기업들은 방어막이 느슨하기 짝이 없다. 옥스포드 대학 경영대학원의 콜린 메이어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해외 기업에 피인수된 영국 기업 이사진 90%는 1년 내로 쫓겨날 정도다. 한편 경제가 저물어가면서 사회 전반의 활기도 떨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다음달 초 치러질 총선과 관련, 영국민들의 반응은 무관심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은 세계 최고(最古)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내세워 온 바 있다. 현재 그리스ㆍ스페인과 함께 '유럽의 환자(Sick man of Europe)'란 타이틀을 걸고 다투는 영국이 되살아나려면 유능한 지도자들이 등장하는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욱 걱정스러운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