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급박한 위기상황을 넘기기 위해 두 개의 칼을 꺼내 들었다. 재벌을 대상으로 한 재무구조개선약정과 중견기업을 겨냥한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이었다. 기업들은 당국의 서슬 퍼런 구조조정 압박과 위기탈출이 우선이라는 여론에 떠밀려 구조조정의 비수를 아무 소리도 못한 채 받아들여야 했다. 정부는 위기탈출 이후에도 재벌 구조조정에 재무약정을 전가의 보도(寶刀)처럼 이용해왔다. 당국에 이처럼 '효자' 노릇을 해온 재무구조개선약정이 도마 위에 올랐다. 약정을 둘러싼 채권단과 현대그룹 간의 힘겨루기에서 법원이 공동 제재 효력을 중단시킨 데 따른 후폭풍이 현실화한 셈이다. 시장에서는 약정의 제한적 보완은 물론이고 '10년 전의 잣대로 현재를 보는' 과거의 유물인 만큼 차제에 존폐 여부를 심각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비등하고 있다. 더불어 법원의 판결이 적확한 법적 근거 없이 구조조정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은행을 통해 '유사관치'를 해온 데 대한 심판이라는 점에서 시장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제반 법령에 대한 스크린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23일 금융 당국에 따르면 법원이 최근 공동 여신제재를 풀어달라는 현대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것과 관련해 금융권은 다음주 중 채권단회의를 열어 이의신청 등의 불복절차를 결정한다. 당국은 재판상황을 지켜보면서 제도보완 여부를 판단할 생각이지만 달라진 시장환경에 맞게 제도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방향이 잡히는 듯하다. 물론 재무약정의 실체와 필요성에 대한 당국의 믿음은 여전하다. 한 당국자는 "재무약정은 금호처럼 위험요인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유효한 수단"이라며 "법원의 판단도 제도 자체는 유효하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시장의 시각은 다르다. 여러 갈래에서 제도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지만 요체는 생산활동의 주체인 기업을 통제하기 위해 당국과 금융회사가 과거의 잣대로 휘두르는 수단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환란 직후까지도 재벌들은 상호지급보증을 통해 얽혔고 계열사 한 곳이 망하면 연쇄도산하곤 했다. 대우가 그랬다. 이런 위험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기업집단을 상대로 한 재무약정이었다. 하지만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상호지보는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 기업들이 각자도생하는 상황에서 굳이 약정이라는 제도가 필요하냐는 것이다. 최두열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집단 전체로 약정을 맺게 되면 현금흐름에 문제가 없는 멀쩡한 기업의 조달금리를 연대적으로 올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런 점에서 달라진 현실에 맞는 다양한 보완방안들이 거론되고 있다. 먼저 소극적 차원의 수술방안은 현대처럼 재무구조는 좋지 않지만 현금을 넉넉하게 가진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금 유동성이 문제가 없는 기업을 약정체결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것이다. 다만 약정의 근본취지가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인데 현금만 많다고 구조조정 대상에서 빼는 것이 합당하느냐는 반론도 있다. 한 시중은행 고위임원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해운ㆍ항공 등의 약정을 놓고 문제가 됐듯이 차제에 현금 보유량이나 산업별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한 새로운 구조조정 기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문제가 된 부분을 은행법 등의 미세수술을 통해 고칠 것이 아니라 기업구조조정촉진법처럼 보다 정교하고 양성화된 법의 형태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자율협약이라는 어정쩡한 '음의 규제'가 아니라 약정기준 등을 투명하게 알려 상호 간의 책임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일각에서는 재무약정제도 자체를 폐지하자는 주장도 적지 않게 나온다. 여신규모 500억원 이상 개별기업의 경우 비슷한 내용으로 상시위험평가를 하는 마당에 집단을 대상으로 한 약정을 통해 중복규제를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중규제이자 과잉간섭이라는 뜻이다. 재무약정 대상 기업의 한 재무 담당 고위 임원은 "재무약정이나 워크아웃이 구조조정 자체를 위한 제도로 운용해 오면서 기업의 타율적인 구조조정을 강요해 온 것이 사실"이라며 "기업은 미래를 위해 뛰고 있는데 제도적인 틀은 과거에 머물고 있는 현실에 대한 당국의 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