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최대 부호인 알 왈리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자는 세계 최대 금융기관인 씨티그룹에 가장 영향력이 높은 인물로 통한다. 그는 씨티 지주회사의 지분 3.6%를 보유, 개인 최대주주이다. 씨티그룹의 지분 가운데 바이클레이즈(4.6%)등 월가 기관투자자 지분이 30%에 이르고 있지만, 그는 씨티그룹에 기관투자자 연합군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월가의 내로라 하는 기관투자자들도 국제 금융계의 큰 손이자 투자의 귀재라는 명성을 믿고 왈리드 왕자가 내린 결정을 대체로 수긍한다. 그는 찰스 프린스 씨티그룹 회장의 퇴진을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왈리드왕자는 프린스 회장의 퇴진설이 불거지던 지난달 초순까지만 해도 현 경영진에 대해 전폭적인 신뢰를 표시했다. 그가 프린스회장에 대한 지지를 접고 경질키로 한 것은 프린스 회장이 서브 프라임 관련 손실규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등 리스크 관리에 취약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최근 왈리드 왕자와 인터뷰를 한 포춘에 따르면 프린스 회장은 65억 달러의 상각 처리 발표를 하기 직전 왈리드 왕자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이것이 전부냐"는 질문에 프린스 회장은 "그렇다"면서 "4ㆍ4분기엔 정상화될 것"이라고 자신감까지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2주일 뒤 4분기 중 80억~110억 달러의 추가 상각처리가 확인되자 왈리드왕자는 사령탑 교체를 결심했다. 포춘은 "당시 프린스회장이 스스로 사퇴하지 않았다면 왈리드왕자는 공개적으로 사임을 요구했을 것"이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프린스회장이 실적을 악화시키면서도 자리보전에 집착한 것이다. 왈리드 왕자와 씨티그룹의 인연은 지난 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씨티그룹은 대규모 투자한 중남미 채권이 부실화하면서 부도위기에 몰렸다. 이 때 왈리드왕자는 씨티그룹에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그가 씨티그룹에 8억 달러를 투자하자 주식 투매는 진정되고, 씨티그룹은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왈리드 왕자는 씨티그룹 처럼 일시적 위기에 몰린 우량기업의 주식을 산 뒤 장기간 보유하면서 수익을 극대화하는 투자로 유명하다.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 가치투자로 명성을 날리는 것과 흡사하다. 서방 언론들은 이를 두고 그에게 '아라비아의 워런 버핏' 또는 '워런 알 버핏'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미 캘리포니아 멘로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아버지로부터 30만 달러를 받아 비즈니스를 시작, 70년대 중동 오일붐 시절 건설수주 중개료로 큰 돈을 벌면서 현재와 같은 국제 금융계의 큰손으로 부상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의 재산은 대략 200억 달러에 이르며, 애플과 포시즌호텔, 유로 니즈니 등에 수십억 달러씩 투자하고 있다. 2001년 9ㆍ11테러 직후 주가가 폭락한 씨티그룹에 5억 달러를 추가 투자하기로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을 보유한 다우존스를 인수한 호주 출신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도 그의 도움을 받았다. 지난 2005년 머독 소유의 미디어 지주회사인 뉴스코프의 2대주주인 리버티미디어가 적대적 M&A를 시도하자 왈리드 왕자는 머독의 백기사로 나섰다. 그는 당시 9억7,000만 달러(5.5%)투자하면서 머독 지지를 선언했고, M&A분쟁은 결국 머독의 승리로 끝났다. 왈리드 왕자는 씨티그룹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하지만 혹독한 경영감시자이기도 하다. 씨티그룹이 지난 4월 전직원의 5%에 해당하는 1만7,000명을 감축하기로 발표한 대규모 구조조정계획도 그의 작품이다. 왈리드왕자는 지난해 9월 "씨티그룹은 비용통제가 이뤄지지 않는다"며 "주주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이르렀다"며 경영진을 압박했다. 서브 프라임 투자손실로 최소 15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이 발생한 씨티그룹은 배당금 지급이 연기 또는 축소될 것이라는 분석에 나오는 등 또다시 유동성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씨티그룹이 또다시 위기에 직면한다면 왈리드 왕자가 과거처럼 구명줄을 던질 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