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인간경영이 10년불황도 극복"

일본 경영의 힘
제임스 아베글렌 지음, 청림출판 펴냄
과도한 사업다각화 탈피위해 구조조정 불구
종신고용제 등 고유 가치관은 그대로 유지



"잃어버린 10년?" 일본 경제 전문가인 제임스 아베글렌은 누구도 의구심없이 받아들이던 이 구절 끝에 의문사 하나를 붙인다. "과거 10년은 상실(喪失)의 시기가 아니라 매우 활발하게 보낸 10년이었다. 정체의 10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말이다." 1990년대 초 이후 부동산 값 하락과 함께 찾아온 일본 경제 침체기. 아베글렌은 이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표현하는 것에 고개를 젓는다 저자 제임스 아베글렌은 일본 경제와 기업 경영에 대해 날카로운 분석력을 지닌 외국인으로 꼽힌다.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아베글렌은 포드재단 연구원으로 1955년 일본을 방문하고 1958년엔 '일본의 경영'이라는 책을 발표한다. 이 책에서 사실상 그가 처음 소개한 '종신고용제''연공서열제'의 개념은 일본 경제를 지칭할 때 꼬리표처럼 늘 따라붙는다. '일본의 경영'이 발표된 지 50여년이 지난 지금 그는 다시 일본 경제를 뒤돌아본다. 과연 1990년 중반 이후 10여년간 일본 경제는 '상실의 시대'였는가. 저자는 이 10년을 일본 기업이 전략과 구조를 재편하는데 결정적인 노력을 쏟아 부은 시기라며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고성장 시대 일본 기업은 높은 시장 점유율, 과도한 은행 차입과 설비투자에 집중했다. 성장의 파티가 끝나면서 일본 기업의 경영전략 초점이 바뀌기 시작했다. 시장 점유율 보다는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중시하고 우후죽순 늘어난 기업 수를 줄이는 통합 작업에 몰두했다. 고도 성장기 때는 벌여 놓기만 하면 장사가 됐지만 성장이 멈춘 시기에는 과도한 사업 다각화에서 벗어나 경쟁력 회복을 고민해야 했다. 성과는 훌륭했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 세월동안 일본 기업들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석유업계는 14개회사에서 4개 회사로 줄었고 시멘트 업계 대기업은 7개에서 3개 회사로 감소했다. 철강업은 5개 대기업에서 4개로 줄었고 지금도 통합 작업이 진행중이다. 그 결과 질병으로 흐느적거리던 일본 경제는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베글렌이 체질 개선 성공의 대표 주자로 꼽은 일본전기주식회사(NEC)를 보자. 91년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위였던 NEC는 이후 시장 점유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2001년에 6위로까지 떨어지는 수모를 겪는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 사업에 집중하는 등 사업 구조를 하드웨어 중심에서 소프트웨어로 옮기면서 기업 면모가 확연히 달라졌다. 통신 기기와 컴퓨터 중심의 종합 전자 기업이었던 NEC는 생존 위기의 폭풍을 극복하면서 또 한차례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저자가 눈 여겨 보는 대목은 NEC가 다각화된 사업을 정리하고 대대적인 기업통합을 벌이면서도 일본 경영의 특징으로 꼽히던 '종신고용제'와 '연공서열', '기업내 조합' 등을 확실히 지켜냈다는 점이다. 일본 기업의 구조조정은 근무수당과 격년제 보너스를 줄이고 시간제 근로자를 늘려 경비를 절감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영ㆍ미식 정리해고 방식을 따르지 않고 인간 중심의 고유 가치관을 버리지 않았던 일본의 선택은 서구 언론의 따가운 비판의 시선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유쾌한 성공을 거뒀다. 아베글렌은 영ㆍ미식 주주자본주의와 기업지배구조를 만능 열쇠로 바라보는 시각에도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일본 기업은 사회 조직이며 가족이고 공동체이며 마을이다. 미국의 기업 지배 구조는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반드시 직원의 희생이 따른다." 저자는 엔론, 월드콤, 타이코 등 주가 상승을 위해 회계 부정을 저지르며 도산한 글로벌 기업들을 예로 들며 결코 영ㆍ미식 기업 지배구조가 절대선의 기업 모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영ㆍ미식 기업지배 구조와 주주자본주의의 길에 온통 정신이 쏠려 있는 우리 현실에 비춰 볼 때 신중하게 새겨 볼 만한 대목이다. 고도 성장기에서 성숙기로 경제 체제가 변화하고 부동산 거품 현상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저자는 10년 장기 불황을 이겨낸 일본 경영의 힘을 통해 새로운 변화의 길로 안내하고 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