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경기침체(recession)`라는 용어를 한번도 쓰지 않았다. 자신이 그 단어를 쓰면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001년 미국 경제가 9개월 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할때도 그는 `성장력 약화`, `경제 활력 둔화` 등의 단어를 선택했다. 뉴욕 월가의 이코노미스트들이 그의 말을 해석할 뿐이다.
그런데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며칠전 한 모임에서 “한국 경제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침체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해 올해는 더 악화됐다”고 말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한국 경제는 지난해 말부터 마이너스 성장을 한 셈이다.
미국에서 `경기침체`란 통상 2개 분기(6개월) 이상 마이너스 성장을 말하며, 공식적으로는 저명 경제학자들로 구성된 전미경제조사국(NBER)의 선언으로 결정된다. 이 정의대로라면 한국은 지난 3년 사이에 경기침체를 겪지 않았다. 그런데 한은 총재가 과감하게 새로운 정의를 내린 것이다.
그린스펀 의장은 지난 3년 동안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가 취한 행동은 공격적이고, 선제적이고, 버블 경제를 연착륙시키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 총재의 말대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경기 침체가 시작됐다면 지난해에 공격적으로 금리를 내렸어야 했질 않은가. 그때 한은은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며 금리 인하에 소극적이었다.
민간 학자들의 용어 사용에도 오류가 발견된다. 삼성경제연구소와 현대경제연구원은 연초에 한국 경제가 `더블딥(double dip)`에 빠질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선 짧은 기간에 두번의 경기침체를 겪는 것을 `더블딥`이라고 정의한다. 한국 경제가 최근 마이너스 성장을 한 적이 없었으므로, 더블딥 자체가 거론될 수 없다.
민간 연구소는 한은에 거꾸로 가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금통위가 금리를 내린 후 부동산 거품론을 제기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연초에 금리를 내렸어야 하고, 최근의 금리 인하는 잘못이라는 얘기다. 흥미로운 일은 미국에선 그린스펀의 발언을 놓고 경제전문가들이 평가하는데, 한국에선 민간 연구소의 평가에 중앙은행 총재가 얼굴을 붉히고 있다는 점이다.
의사는 환자의 병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정확한 처방을 내릴 수 있다. 하물며 경제용어조차 정확히 구사하지 못한다면, 진단은 물론 처방 자체가 어려워진다.
<장순욱기자 swchang@sed.co.kr>